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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중정원 Mar 01. 2022

내 노력은 시간당 얼마짜리일까?

“저 사람 10분 상담비가 9만원이래.”


저녁 자리에서 같이 야근을 하던 동료가 TV에 나온 유명 심리상담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한 시간에 50만원? 우와. 좋겠다. 나는 하루에 9만원이 안될 것 같은데.”


이런 소리를 하며 입에 음식을 집어넣고 있는데, 옆에서 한 마디 툭 거드는 사람은 우리 팀장님이었다.


“저 사람의 한 시간과 우리의 한 시간은 다르지.”


“왜 다를까요? 누구나 똑같은 24시간이 주어졌는데….”


“저 사람이 가진 경험과 지식과 기술과 모든 서비스에 대한 전문적인 역량들. 그동안 그 사람이 쌓아온 분야의 커리어. 그게 바로 본인 시간의 값어치가 되잖아.” 팀장님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저 사람이 쌓아온 24시간이 꾸준히 쌓이고 쌓여 지금의 본인을 만들었을 거니까.”


“저도 한 시간, 한 시간 열심히 일은 하는데요. 아직 경력이 없어서 그런가?” 툴툴거리며 내가 말했다.


“나는 10년 차 경력인데도 한 시간에 2만 원쯤 될 거야. 힘내 OO씨 허허.”


가벼운 대화였지만 맘이 좋지 않았다. 누구나 같은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왜 나와 누군가의 한 시간의 가치는 다를까?




“야, 당연한 거 아냐? 너랑 그 사람이랑 가치가 다르잖아.”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꺼낸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친구가 핀잔을 주었다.


“직업에 귀천(貴賤)이 없다는 그런 이상적인 말은 나도 집어치울게. 그렇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뭐?” 텁텁해진 마음을 소주 한 잔으로 씻어내며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본 그 사람은 지금 해당 분야의 권위자이자 유명인이고, 너는 너의 분야가 뭔데? 뭐 명확한 거라도 있어? 하다못해 네 부서에서 네가 가진 장점이자 특기는 뭔데?”

친구는 지지 않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을 내 가슴에 내리꽂았다.


“딱히…. 방황 전문가랄까?” 참을 수 없는 고소(苦笑)가 내 얼굴에 피어올랐다.


“미X…. 누가 그런 전문가를 찾냐?”  친구도 나를 따라 킬킬거렸다.


“난 그래도 이것저것 하겠다고 노력은 많이 했는데. 점점 사회에서 말하는 성공(成功)의 표본이랑은 점차 멀어지는 느낌이야.” 내가 말했다.


“네가 말하는 게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경제적 성공’이라면 거리는 거의 지구에서 목성(木星)까지만큼 멀어졌겠지.”


“아, 돈 없다는 소리는 지겹고. 글쎄, 어쨌든. 나도 노력 안 한 건 아닌데, 맘이 참 그래. 열심히 살지 않은 게 아니란 말이야. 근데 지금의 나는 뭐야? 결국 시간 당 1만원이야?”


“알지, 알지. 너 열심히 살고 완전 에너자이저였던 것도 알지 한때. 그렇지만 OO아, 무엇이든 ‘노력’에 있어서는 방향이 중요해. 살면서 봐, 노력 안 하는 사람 없어. 너만 열심히 사는 게 아니라고. 네가 느끼기에는 그저 그래 보이는 사람도 뭔가 노력하는 게 있을 거란 말이야.”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뭔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나 잘 하는 일에 대한 탐색이 빠르고, 그 방향을 맞춰서 노력했더라면….”


“네가 TV속에 나오고 있거나, 아니면 시간당 10만원이라도 받았거나.” 친구가 말끝을 빼앗았다.


“그걸 누가 알려줄 수는 없었나? 킥킥.” 술잔을 들며 친구에게 말했다.


 “인생 치트키(Cheat-key) 쓰는 소리 하네. 그걸 누가 찾아주냐? 네가 찾았어야지.” 가볍게 친구의 잔과 내 잔이 맞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친구와의 술자리 대화는 그게 다였다. 결국 누구나 노력하는 것은 같다. 나만 노력하는 게 아니었으니 누군가 방향을 먼저 찾아서 선점해 꾸준히 밀고나간 사람이 결국 경제적이든 유명세이든 성공한 것. 방향을 잘 찾은 노력의 값어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금전’으로 적나라하게 수치화되어 나타난다.


나의 인생에 대한 노력의 값어치는 시간당 일만 원 어치였을까? 원대한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사는 삶을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 지금 상황도 나에겐 과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기 객관화(客觀化)가 덜 된 상태에서 나를 바라보지 못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 끝에 진통을 겪는 것인지도.


누구나 나처럼 한 시간에 일만 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높은 값어치의 몸값을 지닌 사람들과 나는 분명히 다르다. 말 그대로 사회에 주는 가치도 다를 것이고, 사회에서 그 사람에게 두는 가치도 다를 것이다. 높은 가치에는 그만큼의 노력도 당연히 수반되어야 했을 것이니, 지금의 성공에 가까운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온 증거를 지금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마음 한 켠 쓰린 구석이 있는 것은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했는가.’하는 의문.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나였고, 온갖 시험에, 이직을 위한 면접에… 마치 ‘도장 깨기’라도 하듯이 해 왔던 나였는데. 결국 나는 누군가 방향을 찾아서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 중에도 이것저것 탐색만 하는, 정말 ‘방황 전문가’에서 그쳤기 때문인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말은 언제나 격려가 되는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분야만 찾는다면 옛날의 나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며 버티는 노력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고 모든 것에 그야말로 ‘올-인’ 할 수 있는 나인가?


긴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나는 겁이 많다는 것이었다. 유치하게나마 옛날로 돌아가는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그 때의 내가 좋아하는 일보다는 그저 주위에서 ‘이러면 될 것 같던데, 누구는 잘 됐던데.’ 하는 그 말에 현혹되어 앞서나간 ‘구시대의 성공 방법’을 좇았을 것이다. 뭐, 그 결과로 지금의 상황도 누군가 보기에 그렇게 나쁜 것까지는 아니게 되었지만.


현실 상황에 안착하고 자리를 잡은 지금, 어쩌면 나는 지금 노력이란 것을 잊어가는 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내 삶에서 노력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잊기 전에, 긴 방황 끝에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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