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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중정원 Nov 10. 2021

코스모스에 대한 감사일기.

“잘 들어. 보고는 말이야. 하려는 말이 명확하고 제일 먼저 나와야 해. 너 윗분들 시간 없는 거 몰라? 이런 식으로 쓰면 너…”


아침부터 어떤 보고서가 예쁨받는지에 대해 30분간 강론을 펼치는 이 분은 우리 팀장님이다. 그렇게 두괄식을 좋아하는 분이 어쩜 저렇게 같은 말을 늘려서 하는지. 싫은 말 먼저 하고 이후에 살을 붙여나가는 편이니까 나름 본인이 중요시 여기는 그런 구조인 걸까?


창문 뒤 편에 붙은 파리를 좇으며 보고서 강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나마 머리를 15도 정도 숙이고 듣고 있으니 파리가 시선에서 벗어나는 데는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윗 분들 시간은 중요시하면서 내가 이러고 있는 시간은 들판에 굴러다니는 개똥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크흠. 그러니까 내 말은, 잘 하자는 얘기야. 알지? 내가 이 대리 믿는 거?”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대하 서사시 ‘용의 눈물’이라도 찍을 기세이던 장광설이 어째 시트콤 ‘하이킥’ 쪽대본으로 끝나나 놀람도 잠시, 행여 다시 2절이 시작되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돌아섰다.


돌아서며 눈을 돌리니 저쪽 입구에서 웅성거림과 함께 그 ‘높으신 분’중 한 분이 보였다. 본부장이다. 본부장이 입구 옆 팀부터 마을을 순시(巡視)하는 원님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고 말을 걸고 있었다.


‘아…. 어쩐지….’


우리 팀장님은 소시민인지라 권력이나 지위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냘픈 한 송이 코스모스가 된다. 아마 위대하신 본부장님 앞에서 아침부터 사원을 쥐 잡듯이 잡는, 흔히 말하는 ‘꼰대’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겠지.


본부장은 누구 유력 정가의 핏줄이라나 해외 유학파라나 하는 무성한 소문과 함께 최근 새롭게 등장한 말 그대로 슈퍼노바 임원이었다.


“아이고, 본부장님. 어떻게 저희 부서에를 다…? 이 대리. 얼른 커피 한잔 타 와요.”

버선발로 마중 나오며 팀장님이 본부장 영전을 시작했다.


“아닙니다. 차는 옆 기획실에서 마셨습니다. 임원회의 참석하러 가는 길에 총무부는 직원들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나 한번 들러봤습니다.”


본부장은 여전히 아빠 미소다. 그래. 저런 자리면 회사가 자식처럼 사랑스럽겠지. 나라도 저렇게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아이고, 본부장님이 계신데 직원들이 무슨 걱정입니까. 핫하. 저는 아주 본부장님이 저희 업무를 살펴봐 주신다고만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 박 대리? 핫하하하.”


오십이 갓 넘은 팀장은 어떻게든 은퇴 전에 과장 한 번 달아보겠다고 안달복달이다. 그러려니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흔히 말하는 높으신 분들이 행차했을 때나 혹은 전화라도 할 때마다 코가 바닥에 닿다 못해 파고들 정도로 굽신대는 모습이 퍽 안쓰럽다.


그러다가도 평소 아랫사람들한테 대하는 걸 생각해보면 그 낮디낮은 코를 쥐어비틀고 싶을 정도로 꼴사납기도 하다. 안하무인식 태도에 툭툭 던지는 인격모독성 발언이나 본인 기분이 별로면 업무까지 뒤집어엎는 스타일.


항상 나에게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 하고 다짐하게 해 주는 우리 코스모스는 오늘도 열심히 ‘사회생활’ 중이다.


“… 그러니 저는 이제 그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이고, 벌써 가시게요? 본부장님! 어떻게…? 오늘 점심이라도 같이?”

“다음에 하겠습니다. 약속이 있네요, 오늘은.”

“아이고, 이 기회를 또 놓치네요. 그래도 밥은 제가 한 번 산 겁니다? 핫핫핫. 다음번에는 사무실 말고 좋은 곳에서 식사라도 같이! 꼭! 부탁드립니다!” 핫하하.”


본부장이 떠나니 약 10분간의 촌스러운 희극도 끝이 났다. 부서의 작은 소요도 금방 사그라들고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와 타이핑소리로 가득해졌다.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창가에 줄 세워둔 화분이 햇살을 받으며 잠자고 있다.


얼마 전 옆 자리 직원이 노트를 갖고 있는 것을 봤다. 제목은 ‘감사일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감사한 일이 생긴 것을 정리하는 용도란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 순간 보니 사람이 너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삶의 긍정적인 부분을 찾기 위해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동료의 말에 내가 만약 적게 된다면 뭐부터 적을까 고민해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우리 코스모스님. 한결같이 꾸준하게 반면교사로 삼을 모습들을 보여주는, 매일같이 나를 꼭 한 번씩 돌아보며 내가 이 거친 사회생활 속에서 나를 잃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는 귀한 존재이시다.


‘오늘도 덕분에 반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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