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지금의 나는 어떤 색을 고를까?
“저기도 나중에 가 볼까? 점심특선 있대.”
점심을 먹으러 직장 동료들과 한 차로 이동하던 무렵, 조수석에 앉은 팀장님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오리집이었다.
“특선이요? 뭐뭐 나오는데요?”
“글쎄... 뭐 구이랑 이것저것 주지 않을까?”
흔한 직장인의 점심시간 대화를 주고받으며 오리집 간판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정작 엉뚱한 곳에 시선이 머무르게 되었다. 오리집 간판에 그려진 오리 캐릭터. 동그란 리본 디자인을 바탕으로 우리 집이 오리 요리 하나만큼은 최고라는 표정과 함께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는.
내가 주목한 것은 캐릭터의 디자인이 아니었다. 내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것은 오리의 주둥이였다. 매끈하고 길게 빠진 오리 캐릭터의 부리는 노란색이었다. 씩 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그렇구나. 그렇게 새어나온 미소는 내 어린시절 기억의 한 조각에서부터 비롯된다.
정확히는 30년 정도 전일 것이다. 왜냐면,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 전이었던 것은 확실하니까. 그렇게 오래된 일을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딴에는 어린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서 느껴진 나의 억울함이 응어리진 채 남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크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에 나는 먼저 학교를 다니던 형을 따라서 태권도장과 함께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었다. 형은 하교 후 태권도를 배우러 학원에 오고, 나는 오전에는 동안에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수업(?)도 듣고 아마 점심에는 뭐 도시락도 까먹고 했겠지? 그러고나서 형이 학원에서 태권도 수업까지 마치면 형의 손을 잡고 걸어서 10분 거리인 집으로 귀가하는 그런 코스. 아마 대략 내가 예닐곱 살 때 즈음의 일상은 그랬을 것이다.
기억의 구석에 자리한 그 날은 유치원에서 숙제가 있었던 날이었다. 나 역시 글을 쓰면서도 ‘무슨 유치원생이 숙제까지 있었어?’ 라고 생각되는 걸 보니 아마도 유치원에서 못다 한 활동을 집에 가서 마무리 해 오라는 식의 교육방침이 아니었을까 싶다만, 어쨌든 작고 가벼운 그 유치원 가방에 나름의 숙제를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거창한 숙제는 아니었다. 오리 한 마리를 색칠해서 내일 등원(?) 시 들고 와서 검사받는 것. 유치원생 맞춤형 숙제.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지만, 어린 유년기의 나는 숙제보단 노는 게 너무 좋았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의 형은 네 살 어린 동생과 정말 잘 놀아주었고 그러다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집 안팎을 누비며 뛰어놀기 바빴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절대로 숙제를 남겨놓고 노는 유형이 아닌지라 의도치 않게 주변에서 ‘우등생이네.’, ‘모범생이네.’ 소리를 듣기도 한다만, 그건 정말 모르는 소리다. 나는 진짜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과제를 후딱 해치워버리고 마음 편하게 게으름을 피우려고 그렇게 노력한다는 것을.
어쨌든, 코흘리개 아가였던 난 집에 가서는 숙제가 있다고 말은 한 모양이다. 그러고 저녁도 먹고 실컷 놀면서 무한하던 체력이 빛을 바래갈 무렵, 나는 이제 그 때의 젊은 엄마(무려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리다. 세상에.)에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숙제를 해야 된다고. 나 내일 색칠공부 해서 선생님한테 검사받으러 가야 한다고. 칭얼거리면서도 나는 내가 숙제를 할 생각은 없었나보다. 그때 당시 우리 집은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 중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늘 가게는 젊은 아버지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어 저녁 무렵부터는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 친구들의 수발까지 들면서 우리 두 형제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날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들은 들이닥치기 시작했지, 우리 집 재롱둥이이자 귀염둥이(?) 막내는 숙제있다고 징징거리면서 꽁무니만 쫓아다니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자기가 직접 할 생각은 없어보이지. 답답한 엄마는 바닥에 누워서 뒹굴거리며 울락말락하는 내 애교 섞인 표정에 못내 숙제를 대신 해 주기 시작했다. 엄마의 손에 숙제의 부담을 내던진 나는 한껏 마음 놓고 누워서 다시 동화책을 봤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었나 그랬을 것이다. 잠시 후, 숙제를 맡겨놓고도 내심 불안하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했던 나는 내 숙제의 진행여부를 검사하러 엄마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갔다.
“어! 이게 뭐야!” 소리를 지른 것은 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엄마 손에 들려있는 ‘검은색’ 색연필이었다. ‘오리를 칠하는 데에 검은색이 대체 왜 들어가지?’ 하는 생각으로 엄마가 한 숙제를 살펴보니, 웬걸. 엄마는 오리 부리를 검은색으로 칠해놓은 상태였다.
“아니, 오리 부리가 왜 검은색이야! 노란색이지!”
하는 식의 투정과 짜증을 내며 나는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다시 칠할 수도 없게 숙제는 단 한 장만 받아왔고, 엄마는 이미 검은색으로 오리 부리만큼은 완벽히 칠해놓은 상태였다. 그 외에는 손대지 않은 상태. ‘아니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지?’ 하는 생각으로 망연자실하게 엄마를 쳐다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조그마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게 뭐야! 왜 검은색이야! 검은색 싫어!”
라는 식의 분노와 슬픔, 고통이 뒤섞인 떼쓰기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지가 안 한 숙제를 엄마가 대신해줬는데 퀄리티(?)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떼쓰는 자식. 어르고 달래니 더 어긋나고싶은 마음이었는지 나는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고, 내 울음소린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야 인마! 시끄러워! 네 숙제 엄마가 대신 해 줬는데 어딜 울어! 그럴 거면 가져가지 마!”
듣다 못한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니 울음은 그만 그쳐야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으면 육체적 훈육(?)도 가해지던 그런 낭만의 시대였기에(지금이나 그때나 아픈 건 참 싫어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아무리 울어도 엄마가 칠한 오리 부리는 다시 내가 생각하는 노란색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는 나이였다. 결국 오리 부리는 검은색인 채, 내가 엄마에게 색연필을 받아서 몸통을 어떻게 칠하고, 그렇게 마무리가 된 채 숙제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 이후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어떻게 검사를 받았는지도 모르겠고.
‘오리의 부리는 노란색이다.’ 그것은 나만의 세계에 존재하던 오리의 법칙이었다. 그동안 봐 왔던 오리들은 디즈니에 나오는 도널드 덕이라던가, 아니면 동화책에 나오는 하얀 오리들 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유치원생이던 나의 세계는 그만큼 좁았고 그랬던 내 세상의 법칙이 외부의 힘에 의해 깨져버린 그 날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그 충격은 적잖이 컸었나보다. 나의 세계에서 내가 생각하는 질서는 생각보다도 엄격했고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나에겐 용납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게 아닐까.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애들 숙제에 우리 엄마는 왜 대체 검은색으로 부리를 칠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엄마는 평범한 범주에 갇혀있지 않았던 깨어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새끼 오리’를 표현하고자 한 농촌 출신의 극사실주의 화가였을까? 어찌됐건 세상이 무너진 경험을 한 이후로 나는 오리 캐릭터의 부리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때의 충격과 쓰라린 아픔도 떠올리고, 대체 왜 검은색이어야만 했는지를 상상하다보면 어느새 입가에는 미소가 퍼져나오고 있다. 역시나. 이번 오리도 부리는 노란색이었다.
※ 만약 내가 그날 오리 주둥이를 노란색으로 칠했다면 몸통은 어떻게 칠했을까? 흰 오리만 보아 왔으니 흰 색으로 그냥 두었을까? 색칠할 공간이 남아있는데 그걸 건드리지 않고 검사를 받으러 갔을 것 같진 않다. 그랬다면 숙제를 다 안 한 것 같으니까 어린 마음에 자신감을 더 잃었을테니.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오리 부리를 검은 색으로 칠할 수 있는가? 그것도 못할 것 같다. 역시 본인이 만든 세계를 깨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