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의 존재
로고스와 뮈토스가 있다.
뮈토스는 신화이다. 과거 인류는 천체의 움직임과 기상의 변화 그리고 세계의 구성과 삶과 죽음을 신앙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자연 재해는 신의 노하심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질병과 사고 또한 그러했다.
뮈토스는 비이성적인 것의 산물로 받아들여져왔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곧 뮈토스는 무지의 상징으로 생각되곤했다.
뮈토스는 시도였으며 신앙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왜 우리가 살고 죽어야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목적성을 부여했고, 인간이 인간인채로 존재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자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인지했고 그것이 세계관이 되었다. 뮈토스는 곧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었으며,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먼 옛날 어린아이에게 꿈을 심어줬으며 그들에게 만남과 이별의 의미와 이유를 설명해줄 것들이 바로 뮈토스 였다. 그것은 오늘 날에도 남아 수많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에 설렘을 전해준다.
로고스는 이성적인 것으며 논리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신적인 인과가 아니라 자연 과학적은 인과관계를 따라 볼 수 있게되었고, 자연물은 더이상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가치와 자아를 상실한 대상이 되어있었다.
인간은 더이상 자연물을 숭배할 필요가 없게되었으며, 인본주의의 등장에 따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의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땅과 자연의 주인이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것은 인간 이성의 힘으로 이뤄진 인간의 산물이었다.
더이상 뮈토스라는 신앙이 필요치 않아졌고, 신앙은 도태되어야할 불합리한 존재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폭력과 탄압이 종교의 이름으로 이뤄졌으니 종교는 이제 자신으로 인해 흘렸던 피의 댓가를 치뤄야했다. 그것은 역사에서 종교의 자리가 점점 설 곳을 잃어가는 것. 곧 종교의 죽음으로 대체될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승리였으며, 인간 존재의 능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더이상 인간 설 것은 없었다. 로고스는 이해를 의미했고, 인간은 자연과 타자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포용과는 다른 의미로서 이성적 분석과 이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인간이 잃어간것은 극도의 포용성 속에서 중심과 진리를 상실했다는데 있었다.
인간은 더이상 절대적인 것 곧 기준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상대주의가 그 고개를 들고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계관이 무색해지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바로 신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뮈토스와 로고스의 조화라고 볼 수 있으며, 탈신화한 인간 존재의 세계관을 바로잡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절대적 존재에 기대고 싶은 존재론적 외로움을 해소하고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해야할 이유, 인간이 세상을 사랑해야할 이유를 말했다.
로고스가 말하는 이유는 인과에 대한 이유였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곧 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러한 것에 더해서 가치의 영역을 다루고자 했다. 원인과 결과를 보다 다른 눈으로 조명하기 시작했고, 가치의 이유를 다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극도의 합리주의와는 다른 해야할 이유, 하지 말아야할 이유였다.
곧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눈. 타자에 가치를 부여하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효율을 위한 공리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공의였다.
이 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은 세계를 아끼고 지켜야할 이유를 설명하게 되었다. 단순히 유기체적 존재인 인간과 유전자를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선 인간이 신적 존재에 다가서게 하는 정신적 성장으로서의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가치의 영역을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고민한다. 그것이 현 시대의 종교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종교는 상대성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을 제시한다. 종교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학문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곧 인문학적인 영역에서 종교는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효용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신념을 이야기 하는 것은 뮈토스와 로고스의 융합의 과정이며, 이 두가지가 건강한 균형을 이룰 때라야 종교와 이성 역시 건강하다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극단에 치닫으면 병들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자신과 주변을 파멸적으로 괴롭히게될 것이다.
신학은 사랑해야할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이 내가 이해야하는 신학이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