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과 기독교에 대한 묵상
천지 불인 이만물위추구 天地不仁 以萬物爲芻拘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拘
-노자(老子) - 도덕경 제5장
하늘의 뜻은 종종 덕(德)이 없다고 느껴진다. 순환을 거듭하는 생태계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생명은 살고 죽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통과 죽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자연에 물아를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생사가 부질 없이 느껴지고 고통은 이치 속에 점멸했다 사라지는 작은 꽃으로만 보일 뿐이다.
때문에 하늘에 대고 이치를 찾으면 자연은 극도의 인과관계 속에 그저 일어나는 현상으로 환원될 뿐이다. 그들은 그저 존재한다. 때문에 노자는 자연에 순응하여 받아들일 것을 말한다. 천지간의 운행에 요동하지 말고 스스로를 지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인생의 감각 너머의 것을 추구하는 성인도 이와 같다. 때문에 민초는 성인 앞에선 지푸라기가 된다. 노자의 고견에 천지와 성인은 본질적으로 인(仁)하지 않다.
실제는 어떨까? 백성들은 대자연 앞에 지푸라기 개처럼 휘둘리고 죽어간다. 자연재해는 인간이 스스로의 삶에 아무리 큰 의미를 부여하여도 그저 덧없는 유기체의 삶과 죽음일 뿐이란 걸 보여주는 듯하다.
성인은 어떤가? 성인은 우리가 우러르지만 성인은 개인에게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성인 곧 지도자는 자연처럼 질서를 위해 백성을 타자화한다.
노자의 도의 극한은 자연이며, 자연은 본성적으로 인(仁) 하지 않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도 천지불인과 성인불인은 찬성과 반발을 동시에 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길 원한다. 내게도 천지는 불인해 보인다. 거시 세계는 역시 불인하다 못해 배덕하게 보일 때가 있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실존한다. 그것엔 오직 실존뿐이며 고로 자연의 본질은 실존이다.
그러나 사람은 종교 혹은 철학 또는 신념을 갖는다. 이것들의 본질 그리고 극상의 도는 세계 이해에 있다. 기독교의 본질은 내세적 신앙을 갖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도달점을 가지고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때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자연과학적 인과를 넘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철학적인 방향성을 부여받는다. 곧 신념은 본질을 갖게 한다.
종교를 갖는다는 건 실존에 앞서는 본질을 숭앙하며 그 본질 속으로 실존을 던져 최상의 가르침이라 여기는 그 가치로서 실재하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념은 실재가 되며 예수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가는 내세를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실제적 다스림이 된다.
본질에 스스로를 내던짐은 본질의 다스림으로 들어가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크리스천은 세상이 자못 불인(不仁)해 보일지라도 덕(德)을 추구해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것 또한 인간 중심성을 넘어 다시금 천지를 사랑하여 품는 것은 무감정한 하늘이 아닌 인격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랑은 인격의 특권이며 차별성 곧 본질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산술적 가치를 초월한 존재 양태에 대한 가치는 오직 지성이나 인격을 가진 존재만이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성이 행동할 때 비로소 철학은 생명을 얻어 숨 쉬는 존재가 된다. 이로써 인간은 인간이 된다.
천지와 성인이 불인하여, 사람이 부덕하여 세상엔 아픔이 넘친다. 이 고통은 실재하나 공감과 상상을 상실한 죽은 지성에게 이것은 그저 감정 없는 법칙과 현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천지의 인식법인 타자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주체가 되는 인격뿐이다. 인격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의 계명과 그 계명이 세상의 질서가 되어 사랑이 다스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며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임을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게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회개를 해야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타자화를 돌이키며 사랑해야하기 때문이다.
불인한 세상 속에 사랑하는 존재가 되길. 나는 오늘도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