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야기
오늘 죽는게 내일을 살아야하는 것 보다 두려울 때 사람은 스스로 죽는다.
다시 말해서 자살할 용기로 살아가라는 말은 기만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용기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 역시 그랬다.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다.
내일 아침 눈을 뜰 이유가 없을 때, 내일도 살아야하는게 미치게 괴롭고 두려울 때 용기가 없어도 우리는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라는 말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나도 그런 말은 쉽게 하지 않는다. 그 마음과 처지가 어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큰 파도가 밀려오듯 근원부터 다가와 거대해진 문제를 내가 감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세에 대한 신앙 곧 통상적인 개념의 천국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보수적인 신앙 교육 아래에서 자살자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논할 때, 기존 교회의 입장은 아파서 죽은자에 대한 기만에 지나지 않듯, 그들의 구원론 역시 믿는자의 지나친 잘난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자살자와 불신자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정말로 예수를 닮은 것 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에게 언제나 먼저 찾아가 친구가 된 사람은 예수 혼자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라도 배타성을 보여도 된다는 그들의 믿음은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불빛은 눈먼자들이 따라갈 수 없었고, 그들의 음성은 멀리 있는자와 귀먹은자가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참으로 사독파와 다르지 않았고, 그들의 분리주의는 참으로 바리새파보다 선하지 않았다.
때문에 소망을 전하지 못한 기독교는 자살한 자들에 대한 정죄를 시작했다. 나는 차마 자신의 이웃이 절망과 외로움 속에 죽어갈 때 손 한번 내밀지 않고, 눈을 흐리고 귀를 닫아 단절한채 부고를 들으며 지옥에 떨어졌으리란 말을 하는 이들이 자기는 구원 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는 소망은 품지 않길 바랬다.
예수가 구원하고자 했던 생명과 예수가 고치고자 했던 아픔과 예수가 위로하고자 했던 고독과 단절이 정녕 그대 마음에 아무런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그러고도 예수를 사랑하며 그를 믿는다고 말하고 싶은가?
걸어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길을 멈출 마음은 없을까? 사랑의 계명 외에는 우리가 받은 것이 없었다. 예수가 준 새 계명은 첫째도 둘째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에 변명을 들먹인 나는 오늘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그대는 어떨까?
하나님이 준 목숨을 스스로 끊은 죄가, 하나님이 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죄보다 크길 바래야할 것이다. 믿음으로 얻은 의가 방관으로 지은 죄보다 크길 바래야할 것이다.
적어도 교회가 말하는 내세. 곧 천국이라 말하는 죽은자들이 가는 그 나라는 내게 다시 살아갈 이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까닭도 되지 않았다.
예수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나의 사랑을 그가 기뻐하신다는 그 말이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었고,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수렴할 용기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에 나 같은 처지의 외로운 인생을 끝까지 사랑할 나의 소명이 되었다.
성전 밖의 인생에게도 향해있던 예수의 사랑은 분명 세상 모두가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내면 끝에서부터 일깨워주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불행과 실패가 사람의 시작과 끝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절대자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그의 사랑은 어쩌면 모든 이의 이야기의 끝에 구원이라는 한 문장을 더해주고 싶었던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