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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규김 Mar 25. 2022

아픔을 연단이라 말하는 교회에게

우는 자와 함께 울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장 10절)


기독교인들이라면 한번쯤을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가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하여 중대한 영향을 끼친 구절이라 말할 수 있다. 


욥기의 이야기속에서 가족과 재산 그리고 건강 마저도 잃어버린 욥에게 세 친구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통해 욥기의 저자는 당대 유대인들의 신앙의 다양한 측면을 제시한다.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 중 고통을 겪지 않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육체적인 아픔 이외에도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이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 곧 '시험'이라고 여기곤한다. 자신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에 앞서 그들의 인격과 믿음이 성장하고 그들의 교만이 깎여 나가며 그들의 마음의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며, 마침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에는 이러한 구절도 나온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성경은 그것을 해석할 때에 다양한 것을 염두해두고서 해석을 해야한다. 개인적인 묵상과 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만들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단순히 마음에 드는 감상만으로 해석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본래 저자는 누구이고 어떤 독자를 상정하여 만들어졌는가? 어떤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 글이 쓰여졌는가? 이 전승들을 책으로 만든 최종 편집자는 어떤 의도로 이러한 본문을 성서에 포함시켰는가? 고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쓰여진 원전과 다양한 신학자의 해석과 자신의 경험 그리고 현재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적용. 단 한 문장을 해석하더라도 신학을 배운 사람의 책임은 최대한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원래적 의미와 현재의 적용을 도출해내려한다. 


다른 책을 읽을 때에도 그렇지만 이렇듯 성경은 맥락을 중요하게 봐야한다. 이 문장이 어떤 맥락 속엑서 나온 문장인지를 알아야한다. 이 말이 왜 나왔는지를 생각하지 않고서 그저 당장 마음에 감동을 주기 때문에 여기 저기에 가져다 붙이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종교적 가르침이 신자의 삶에 주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 모든 해석의 과정은 결코 소홀히 여겨져선 안된다. 


하물며 책에 적힌 글을 해석할 때에도 이토록 신중하고 조심스러운데 한 사람의 인생과 상황을 해석하는데에는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하고 공감해야하겠는가? 


이웃의 고통을 그저 신의 뜻과 시험이라 말하며 견딤을 강요하고 부조리에 복종하는 것을 순종이란 미덕으로 포장하는 사태가 빈번히 일어나는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등을 돌리고 있었다. 


세상에는 그 고난을 견디지 못해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병과 사고가 언제나 신앙과 인격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남은 삶을 완벽한 비참함으로 몰고들어갈 수 있다. 


고통의 상황의 끝이 욥의 이야기 처럼 재산과 건강이 회복되는 상황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죽임을 당한 그의 자녀들은 여전히 죽은 그대로였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그런식으로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기도에 힘쓰고 예배에 출석할 것을 강권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사람들 진절머리를 내며 완전히 그곳을 떠나가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주는 상처와 핍박을 연단이라 혹은 훈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특히 목사들이 부목사와 전도사들에게 행하는 만행으로 생각보다 흔히 겪을 수 있는 사례들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 15절)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은 이런 문장을 남긴다. 여전히 공감능력을 상실한 삭막한 세상과 교회의 현장에게 이것은 어떤 울림이 있는 말과 가르침으로 다가올까? 


언젠가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 큰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그 삶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진 부모님들을 뉴스에서 본적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간증을 했다. 하나님을 믿어 위로와 힘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자식을 잃은 슬픔을 연단과 하나님의 뜻이라 판단 당하며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놓지 않고 곁은 지킨 이들을 통해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소중한 것을 잃어도 목숨이 붙어있는한 살아가야하는 것이 생명이란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고난 중에 있을 때 그것이 신의 뜻이었음은 그 일이 지나고서 그때를 돌아보며 본인이 고백해야만 그 말을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타자의 상황을 어떠한 공감이나 상상력 없이 잘나고 거룩한척하며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어긋난 인격과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믿는 신이 이땅에 왔을 때에 예수는 병든자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을 고쳐주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프고 죄있는 자들을 찾아갔고 종교지도자와 율법을 가지고도 선을 행하지 않았던 이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본디 그들의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바르고 좋은 말을 하고자 하더라고 그 동기에 깊이 그리고 선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어긋난 열심이 되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야말것이다. 


성경을 경전으로 받는 이들이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율법으로서 명시했으며, 그들의 하나님은 모든 선지자와 계명의 강령을 사랑이라 말했다. 타자의 입장에서 그 아픔에 공감하며 사회의 구조적 악에 분노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그들의 하나님을 똑바로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개인의 영혼 구원의 차원에 머물러있는 신앙은 결코 성경이 요구하는 기독교적인 신앙이라 말할 수 없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그 책은 끈질기게 정의와 공의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며 종말론적 소망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서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종교의 윤리적 수준이 사회의 윤리보다 뒤처질 때가 있다. 아니 이제 그것은 흔하고 흔한 일이 되었다. 세상에 선한 영향을 행사해야하는 스스로의 소명을 저버리고 안으로 파고들며 스스로의 성전을 세우는데에 급급한 종교는 다가오는 시대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사유를 신앙이라 포장하며 내부로부터 스며나오는 썩은 악취를 풍기며 천천히 도태될 것이다. 그들이 믿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버린채로 말이다. 


내가 선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선해야하기 때문이다. <참 목자상>의 저자 리처드 백스터는 자신의 책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세상은 성경보다 신자의 삶을 통해서 성경의 본질을 더 빨리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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