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미워하려면 쉽게 생각하면 된다. 다양한 모습을 보면 얻는 공감과 죄책감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집단으로 엮어 적당히 범주화시킨다. 그러고 나면 아주 쉽고 편하게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게 된다. 개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편견이 투사된 증오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념과 사상의 싸움이 주로 그런 양상이다.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이건 간에 나와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지지하는 것만으로 상대를 합리와 윤리로부터 멀어진 존재로 그릴 수 있게 된다. 신념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곳에서 일하고 공부하는 나에게 이러한 문제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는 말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어휘들이 있다. 주로 동성애가 그렇고 세습과 성윤리가 그렇다. 그곳에 개인은 없다. 기독교가 그토록 좋아하는 계명인 사랑을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인격과 관계는 온 데 간 데 없이 무오 한 말씀에 대한 순종과 그것을 지키지 못한 죄인만 존재할뿐이다. 당연히 그들은 대적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욕하는 것 만으로 신실해질 수 있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란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전에도 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요즘 들어 특히 그런 방식의 미움과 다툼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종교와 정치가 아니더라도 미워하는 집단과 속성 혹은 특징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무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투사한다. 대면하지 않는 온라인상의 커뮤니티는 더욱 쌍방향적이지만 소통만큼은 일방향적인 감정싸움이 두드러진다.
우리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분노는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화합은 인류 문명이 유지될 수 있는 힘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경쟁도 당연한 것이지만 협력은 그 가치에 비해 강조되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좋은 마음을 이용하려는 악의적인 사람을 마주치는 경우에는 마음을 더 쉽게 닫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를 만든다는 건 그런 두려움과 위험부담을 넘어서야 하는 언덕 위에 펼쳐져 있다. 어떤 꽃과 별처럼 향기롭게 빛나지만 상대를 알아간다는 건 장점과 단점을 함께 포용한다는 의미다.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곁에 두고 또 곁에 남는 건 불완전한 인격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살아갈 힘과 견뎌낼 정신적 지지는 바로 이 관계란 데서 기인한다. 삶에 정답은 없다지만 건강 간 삶은 좋은 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소중히 여길 이유는 사상과 금액이 아닌 그저 내가 정하는 가치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깨달아가며 그것이 행복을 정하는 또 다른 기준임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깊이 아는 것은 이를 깊이 사랑하는 일이다.
아는 것은 피곤하기 때문에 머리 복잡한 일이 싫다면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기피하기에는 우린 분노와 미움이라는 손쉬운 자기 파괴적 쾌락에 취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사랑을 권면한다. 그 좁은 길에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