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규김 묵상
가을이 깊어진다. 어둑한 단풍처럼 맑개 갠 하늘이 얼굴을 비추는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세상은 아름답고 밝은 것들을 조금씩 덜어낸다. 곧 눈으로 덮일 땅 위로 소복이 낙엽이 진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나설 때 얇은 외투를 거쳐야 하는 그런 계절이 왔다.
비가 오면 하늘이 멀게만 느껴진다. 구름 뒤로 숨은 야속한 푸르름이 세상을 외면하면 머물 곳 없는 생명들은 추운 거리에서 밤을 보낸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쁜 출퇴근 길의 소음 아래로 조금씩 잠겨 들어가 마침내 긴 겨울이 오면 완전히 조용해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누가 있었냐는 듯. 세상이 변할 때 가장 취약한 이들 먼저 사라져 간다. 세대가 이토록 빨리 바뀌는데 이 사실만큼은 서글프게도 변치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아가는 데에 너무나 미숙하다.
세상의 아픔 속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멀리 있는 하늘을 말한다. 어쩌면 그 신은 아무런 존재의 유비가 없는 것처럼 매정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역자인 내 앞에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아픈데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선한 신 혹은 선한 유일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철학자들의 여러 물음은 사실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해묵은 논쟁을 무시하지 않으려 했다. 그 질문 안에는 아픔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서려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이는 성경이라고 할지라도 똑같이 말하고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의 한 신앙 공동체와 자신들을 어느 정도 동일시하려는 그들에게 있어 신의 완전무결함과 그를 통해 이뤄질 정의는 신념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전제였다.
그러나 사실 성경 안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와 신의 섭리는 세상의 질서와 선 혹은 유지와 정의 그 자체가 신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존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로 그 창조의 일을 이어받은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종종 지나치게 안락한 내세만을 지향하는 말을 설파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근본주의적 경향과 함께 그릇된 교리 이해가 섞인 설교는 세상을 마치 아무런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은 타락한 존재로만 보게 되는 세계관을 갖게 만든다. 정작 그 말을 전하는 목회는 누구보다 세속을 사랑하면서도 성도가 지갑을 열어 헌금을 낼 때에만 언제 올지도 모를 내세를 위해 헌신하라는 말을 하고는 한다. 이 경우 종교는 아편이 된다.
그러나 비가 오면 하늘은 가라앉은 듯 우리에게 다가온다. 낮고 우중충해서 전혀 아름답다 말할 수 없지만 찬란하지 않기 때문에 생명은 그 아래에서 목을 축인다. 그 아래 찬란한 빛은 희미할지라도 그 안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가 그랬듯 우리는 세상을 포기해선 안된다. 사랑 없이 신앙의 이윤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이미 엇나간 욕심과 자기 위로일 뿐임이 탄로 났다. 사랑은 자기희생적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무런 계명도 우리에겐 없다.
비가 오면 그 밝은 하늘은 멀게만 느껴질지라도 다닥다닥 붙어 추위를 피하는 생명을 느낄 수 있다. 떨고 있는 작은 생명에게 다가갈 때에 우리는 하늘보다 가까운 온기를 경험한다. 어두움 아래 하늘이 보이지 않을 때야말로 사람이 서로를 품에 끌어안아야 할 때이다. 어두울수록. 구름 아래 이 땅이 너무나 암울할수록 서로에게 향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 동행하는 우리야말로 하늘보다 아름다운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