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와 실존주의
카뮈는 말했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이방인을 처음 읽은 게 초등학생 시절이다. 그때 카뮈라는 작가에게 처음 받은 인상은 ‘참 지독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어렴풋한 느낌이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이제는 수십 년은 지난 옛 감정이기 때문이 더 손쓸 수 없이 윤색되었을 터다. 요즘은 카뮈를 반대로 생각한다. 그는 참 따듯한 사람이다.
시지프 신화는 인생과 닮아있다. 인간은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신을 기다린다. 대답 없는 막연함 속에서도 계속 걸어간다. 그 여정은 기다림을 붙잡고 연장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계속 걸어야 한다. 그 끝에는 결국 만남이 있기 때문이겠지.
오늘날 사람들은 카뮈를 ‘실존주의’ 문학가라 부른다. 실존은 무엇일까? 쉽게 말해 실존은 ‘상황’이다. 누구나 겪는 상황. 중요한 건 ‘누구나’이다. 모든 사람은 실존에 처했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 우리는 모두 “그곳에 있다”. 이 실존을 위협하는 게 바로 ‘소외’(Entfremdung)이다. 그곳에 있으나, 그곳에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평생 불러줄 이름이 사라지고, ‘출신’이 ‘인종’이 ‘성별’이 ‘계층’이 ‘학벌’이 오직 남겨졌을 때, 지독한 소외가 그곳에 있다고 말한다. 눈앞에 버젓이 서있는 사람을 없는 취급 하는 것. 더 이상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소외이다.
소외는 강한 능력을 행사한다. 이 능력이 구체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물화”(Verdinglichung)이다. 사람이 물건이 되고, 사람이 목적이 되지 아니하는 것.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 일을 ‘사랑’이라 한다면, 오늘날 사랑을 잃어버린 삶의 자리는 소외로 인해 물화가 발생한 재난지역이다. 이때 실존주의는 “그곳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다.
냉소로 흐려진 눈동자를 돌리는 일이다. 다시금 시선이 사람을 향하게 하라고 설득하는 절규다.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에서 말하고자 했던 게 나는 소외라 생각한다. 그 역시 실존주의로 이해하는 문학가다.
경제능력을 상실한 가장이 흉측한 벌레가 된다. 사람들은 기대를 잃어가고, 반비례하여 혐오감은 증가한다. 결국 가족들은 불쌍한 그레고리 씨를 소통할 가치 없는, 얼른 퇴치해야 하는 괴물로 취급한다. 그가 차디찬 시체가 되었을 때, 사람사이에 오갔던 따듯한 추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 부품처럼 소모되는 세상을 향해 던진 이 질문을 어느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주워 담았다. 그들은 스스로 대답할 의무를 짊어졌다. 시대의 질고를 대신 짊어진 어린양이 된 셈이다.
카뮈의 시피프스 신화는 첫 문장부터 강렬하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일단 인생이 나아가려면 행복을 상정해야 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게 온통 고통과 부조리뿐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바라본 ‘실존’, 인간이 처한 상황은 부조리다.
살려고 발악하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아름답게 치장한 인생은 결국 백골만을 남긴 채 세상에서 소멸한다.
그것까지가 인간이라면, 인생이 과연 아름다운가? 우리는 죽기 위해 살아가는가? 이런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시간에 떠밀려가는 인생은 살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나 결국 내일이 온다.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이다.”
그리고 삶은 언제나 ‘낯섦’ 한가운데에서 방황한다.
인구 대부분이 도시에서 생활하는 오늘날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높은 밀도를 이루며 뭉쳐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주변을 가득 메운 타자들 사이에서 나 역시 ‘누군가의 타자’로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곳에서 ‘이방인’인 셈이다. 인생이 낯설어진다. 낯선 것은 안주할 수 없는 상태다. 그곳이 고향이 될 수 없고, 마음은 쉴 곳을 잃었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강렬한 의지가 발현돼서 그런가? 아니다. 삶을 지속하는 힘은 “관습”이다. 늘 그랬으니까, 시간이 늘 흘렀으니까, 어찌 되었던 시침은 돌고 내일은 찾아오니까.
사람은 살고 있다. 단조롭고 지루한 반복이 맞이하는 결착점은 ‘죽음’ 뿐이다.
이방인으로 태어나서, 낯섦을 애써 견디며, 습관적으로 하루를 보내다가, 결국 죽는다.
실존주의가 파헤치는 삶은 이토록 괴롭다. 혹은 무의미하다. 그러니 계속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실존은 “있음”의 철학이 연장된 것이다. 서구 형이상학, 철학이란 것은 “있음”-“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존재”에 “경탄”했고, 그 감탄사로 시작된 애정이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여정”이다.
Philo-Sophia, 철학이라 부를만하다. 그리고 ‘실존’은 ‘실제로 그곳에 있다!’라고 외친다. 우리는 있다. 각자의 자리에 실제로 있다. 없는 취급을 당하지만 그곳에 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지만, 결국 한 사람으로서 그곳에 있다. 사랑하길 바라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인생으로서 그곳에 있다. 그래서 카뮈는 사람을 발견해주려 했던 문학가이다. 애써 들여다보아야만 물화를 거둬내고 외로운 인간이 보인다.
삶을 이어가는 힘은 열정이 아니라 행복이다. 당장 가질 수 없는 행복이 인생에 작용하는 힘이 될 때,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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