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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현실주의] 본 회퍼 - 거악의 한복판에서

by 광규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거악이 지배한 세계 한 복판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짓밟혔고, 갇혔고, 결국 순교하였다. 그가 그린 삶의 궤적에는 동조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저항하고자 했던 경건이 남아있다. 악에 묵인한다면, 그저 꾸짖기만 할 뿐이라면 그 도는 값싼 것이다. 그는 동조한 것이고, 행동하지 않음으로 더 많은 비극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불의 앞에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불의와 함께 최악으로 결과를 만드는 침묵하고 조력하는 불의이다. 불의를 매어둘 고삐를 풀고, 침묵으로써 불의에게 정당성을 배가시키는 비겁한 행동이다.


노자가 무위로써 조화를 이룬다면, 본 회퍼에게 조화란 책임회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세계다. 흐름이 악하다면 정면에서 거슬러 올라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에서 고통받는 자”를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서의 사랑이 그곳에 있다. 노자에게 인간이란 스스로를 낮추고 싸우지 않지만, 본회퍼는 스스로를 지극히 낮춘 그리스도를 따라 거악에 맞서 싸운다. 노자에 따르면 은둔자는 도인이지만, 본회퍼에게 은둔자는 ‘도’ 자체를 등지고 도피하는 자가 된다. 자기 구원과 자기 획득에 머무는 ‘이기적 죄성이 그린 자아상’ 일뿐이다.


“Gott ist gerade da, wo es wehtut, wo Menschen leiden.” (하나님은 고통이 있는 자리,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계신다) -『Ethik』, DBW 6.


현실을 책임지려는 사람은 노자의 도를 철저히 거부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는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고통받는 자를 보며, 고통에 신음하는 세계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끝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향할 것이다. 뱀의 혀처럼 너울거리는 고통의 불꽃이 그를 잿더미로 만드려 할지라도, 의인은 도인이 되길 포기하고 그슬리며 그 가운데로 걸어갈 것이다.


노자의 세계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타자 중심과 고통 참여로서의 사랑)이 없다. ‘도(道)’, ‘덕(德)’, ‘자연(自然)’, ‘무위(無爲)’, ‘겸하(謙下)’, ‘불쟁(不爭)’ 등이 핵심 단어로 등장하지만 결국 노자의 도는 사랑하지 않는다. 세계의 준동 원리가 이처럼 사랑이 없고(천지불인), 진정한 도인-성인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 타자를 존재하게 할 뿐이지만 그들을 품지 않으며, 그들을 거둬가지 않지만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大道廢,有仁義;智慧出,有大偽。”

(큰 도가 없어지면 인의가 나타나고, 지혜가 생기면 위선이 커진다.)-「도덕경」 제18장


노자에게 이 “인의”(仁義)란 도가 무너진 곳에서 생긴 인공물이며, 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체물이다. 큰 도가 없어진 상황이란 무엇인가? 그 무엇도 자연스레 흘러갈 수 없고, 세상이 그 자체로 존재하게 두지 않는 고통스러운 통치가 임하였을 때를 말한다. 세계를 조화롭게 하는 도가 상실되었고, 혼란이 폭력과 파괴와 상실을 끊임없이 낳으며 증식시킨다.


유가에서 말하는 ‘인’(仁)이란 사람다움(humaneneses)과 사랑(love), 그리고 배려와 염치에 가깝다. 그리고 ‘애’(義)란 그 ‘인’을 실천하는 윤리적 태도이자, 감정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다운 감정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윤리적으로 표현되었을 때에 이를 인의가 있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인은 황금률과도 관계가 있어서 ‘타자를 향한 배려’를 발전하여 ‘타자 중심의 도덕과 윤리’로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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