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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無爲自然)과 현실주의(現實主義)

by 광규김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단순한 비정치적 자연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양민을 위하고자 ‘위민의식’(爲民)을 지닌 적극적인 정치철학을 전개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통치 이상’이며, 인위로 만들어진 규제보다는 ‘백성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자연을 닮아서 서로의 존재를 넘나들며 훼손하지 않고, 서로 선한 삶을 살아가라 한다. 그 선함이 우리가 아는 선한 것의 이해와는 다를지언정 노자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아주 거두지 않았다. 따라서 노자의 무위는 통치하지 않음이 아니고, 무정부적 자연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한 세상의 혼란함은 결국 ‘욕망’과 ‘과잉’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지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기한 ‘인위적인 것’과 관련된 개념이다. 노자가 바란 것은 무엇인가? ‘무욕’과 ‘무분별’이다. 도덕경 80장의 ‘소국과민’은 백성을 억압하지 않고 삶을 보장하는 정치를 그가 꿈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억지스럽지 않은 통치는 물과 같은 통치인데, 그 물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자처하여 흘러간다.


“성인은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吾惡之 必以其無合人之心爲心)” - 『도덕경』 49장


성인은 백성의 마음에 개입하여 규제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백성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은 과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조차도 백성들이 살아있기를 너무나 원한 것이라 한다. 이때 다스리는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하면, 백성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과 같이 조율하고, 그곳에 무위로 함께 있는 자가 아닐까 싶다.


유가의 가르침은 백성을 교정하고 교화한다. 백성을 가르치고 백성을 이끌고 백성을 억제한다고 하면 이해가 편하겠다. 노자는 반대의 길을 간다. 백성을 조율하되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통치자 스스로 억제하여 백성을 보호한다. 어찌 보면 신선과도 같은 이 통치자는 “불인하다”(聖人不仁)(도덕경 5장)


춘추전국시대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노자는 인간이 본래의 순한 무위로 되돌아가야 한다 말했다. 혼란한 세상에서 고요함을 추구한 것이며, 전쟁으로 서로를 정복하는 세상에서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서로가 잘 살아가게 두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도인은 세상에 참여하되, 그 법칙을 따르지 않고, 어느 정도는 세상 바깥으로 나와있는 사람이다. 그는 삶의 투쟁이 아닌 벗어남을 말한다. 번잡한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유 함이다.


유가는 군자가 나서 정치를 바로잡지만, 노자는 이 개입이 또 다른 인위를 낳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의 가르침에도 저항은 있다, 소극적이지만 존재론적 불순종이다. 세상에 악이 나타났을 때, 인의를 저버린 통치자가 등장했을 때 노자는 그의 존재로 저항한다. 그와 맞서 싸우지는 않되 그를 꾸짖는다. 그리고 그의 정치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악한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그러한 인위에 따르지 않는다.


도는 말할 수 없고 무명하며, 삶은 완전하지 않으나 흐름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불완전함은 교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할 것이며, 사람은 그의 자리에서 묵묵히 존재함으로 살아간다. 도는 이룰 수 없다. 기독교 현실주의 신학자 니버가 말한 진리-사랑-아가페에 대하여서는 어떨까? 니버 역시 ‘사랑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본다. 인위에 대한 경계와 겸손은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신에 대한 개념이 다른의 ‘도’와 서구 기독교의 ‘진리’가 어느 정도 호환이 된다고 봤을 때에, 두 사람의 주장에서는 극히 일부이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교만과 인위(人爲)를 경계한다는 것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도덕은 흐르는 도가 아니라 신적 명령에 입각한 개념이다. 노자의 절대자는 무지(無知)하고 무위(無爲)하며 무심無心)하다. 그러나 니버의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역사적이면서도 사랑과 정의로 자신을 계시한다.


노자에게 인간의 죄란 인위적 욕망과 지식이 도에서 멀어진다고 하지만, 니버는 인간의 본성 안에 구조화된 죄가 존재하며, 말할 수 없는 도가 아니라 선언된 진리 앞에 책임적인 윤리가 요구된다. 노자는 궁극적으로 무위를 통해 조화와 평화를 얻고자 하지만, 니버 같은 현실주의 기독교 신학은 구속과 치유를 말하며, 그곳에서 끊임없이 악과 싸워야 할 막중한 책임적 윤리를 제시한다. 역사적이고 관계적인 것이 기독교 윤리이다.


불가능한 가능성 앞에서 노자는 흘러가고, 니버는 따라간다. 긴장과 자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멀어질 수 없고, 노자가 말하는 도인과 성인이 될 수 없다. 그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역사적인 인간이 될 뿐이다.


니버는 세계대전과 전체주의를 목도했고, 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래적 죄성을 봤다. 인간은 그 안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은혜를 붙들되, 책임을 짊어진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늘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급력을 고려하고서, 닿을 수 없는 가능성인 사랑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이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야 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소명이다. 노자의 윤리를 ‘벗어남’이고, 기독교의 윤리는 ‘짊어짐’이다.


완전한 정의는 이룰 수 없으나 맞서 싸우지 않으면 불의가 승리할 뿐이다. 이때 싸움은 완전한 도에 이르기 위함보다는, 현실을 책임지는 징표에 가깝다.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와 위선 된 종교가 그러한 악이다. 현실주의 하에서 기독교인은 비극을 인지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현실은 언제나 비극 속에 던져진 소인의 투쟁이겠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완성된 사랑과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따라서 노자의 도(道)는 히틀러 같은 거악(巨惡) 앞에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도 안에서는 고통을 감수하며 싸워줄 존재가 없다. 희생적 정의는 그곳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이 적극적인 싸움이 없기 때문에 혼란 속에서 잠시 벗어나 고요를 즐길 뿐이다. 거악이 스스로 붕괴할 것이니, 인위적인 강자는 스스로 꺾일 뿐이니 흘러가게 두면 된다. 도와 합일된 인간은 거악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다. 이 잔인한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는 여기서 고려되지 않는다.


춘추전국은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져 싸운 학살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 갈라짐과 싸움이 스며들어있던 혼란의 시국이었다. 그의 철학은 과연 선한가? 구조적인 악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 질서는 악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질서 역시 역사에서 한 발짝 벗어나려 하기 때문에 윤리적 결단도 없으며, 비극으로 점철된 이 역사의 막중함을 끌어안을 존재 역시 없다. 이런 존재가 제시된 것은 십자가 위에 달려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교뿐이다.


*글에 대한 풀이와 다음 내용은 멤버쉽 자료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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