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드라마는 당대 사람들이 세계관에 그어둔 짙은 하이라이트다.
“지금의 고통은 무엇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살짝 돌려보면, 그 입체적인 고뇌 가운데에서 이런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이 이 모양이 난 것은 누구의 탓인가?”
세상이 본래적으로 이골이 나는 고통과 무질서로 가득했음이 고대 근동 신화가 말하는 문제의 원인이다.
지난번에 다룬 창세기의 창조가 ‘혼돈’과 ‘흑암’ 가운데에서 창조였다면 이를 질서와 빛을 향한 드라마로 말할 수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 어둠과 무질서,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으로 이해했다.
구약 이외에도 고대 근동의 신화들은 이러한 죽음과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는 신이 곧 ‘주신’(主神)의 위(位)에 오를 수 있었다.
마르두크가 티아맛을 물리쳤을 때 그녀의 몸은 세상이 되었고,
다시 킹구를 물리쳤을 때에 그의 몸은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패배한 신격의 잔재이며, 죽은 신의 찌꺼기로 빚은 노예였다.
말이 좋아 신이 빚은 피조물이지, 인간의 역할은 신의 노동을 대신할 ‘도구’였다.
그 세계가 과연 아름다울까? 신이 유지하고 지탱하는 질서는 신의 지배 하에 세상이 있다는 의미이다.
신은 왕이 되었고, 인간은 왕을 위해 일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세상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가?
이러한 고대 근동의 세계관(특별히 인간관) 때문에 신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로서의 인간관은 구약이 가진 독특한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전쟁 영웅이 가장 부각되었고, 그들이 가진 신화가 해방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었다.
이제 모든 존재는 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 세상의 각박함은 이제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는 자유와 즐거움마저도 신의 소유가 되었고, 사람의 즐거움은 신의 즐거움을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고대 근동 세계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이때 신격화된 모든 것의 권위를 해체한 해방 문학이 바로 ‘창세기’라 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이 장면에서 신들의 나라를 위협하고, 주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혼돈과 바다의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담수와 염수는 명령 한 마디에 움직이는 비인격적 자연물이다.
황무지에 빛과 생명, 그리고 모든 것이 운행하기 위한 질서는 신적 명령 아래에 세워졌다.
그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제 수면 위에 떠다니시던 거룩하신 분은 그분이 지은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인간에겐 그들이 맡아야 할 명령이 남아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살아갈 그곳을 가꾸며(경작하며) 살아간다.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경탄” 곧 신이 지은 세상을 향한 감탄이 담긴 표현이다.
다른 말로는 “찬탄”(讚歎)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자신이 이해한 세계 그 자체를 자신의 표현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세상은 이 경탄으로 인해 바로소 시작되었다.
그가 세상과 관계 맺기 시작한 것은 창조주의 맺어줌 속에 이뤄졌다.
“διὰ γὰρ τὸ θαυμάζειν οἱ ἄνθρωποι
καὶ νῦν καὶ τὸ πρῶτον ἤρξαντο φιλοσοφεῖν”
경탄(θαυμάζειν, thaumazein)으로 인해 철학은 시작되었다.
인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이자 특권은 그가 생명이 넘쳐나는 땅을 경작하는 역할을 맡은데 있다.
이는 본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신의 역할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세상을 가꾼다.
그곳은 자기 삶의 터전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제 인간에게는 노예의 책무가 아니라, 창조에 동참하는 ‘책임감’이 부여되었다.
스스로 따라오지 않으면 풍족한 땅을 다시 황무지로 만들 수밖에 없는 막중한 책임이다.
고대근동 신화가 어느 정도 신본주의적 세계이나 인간이 겪는 고통 속에서 너무나 무력했다면,
구약의 세계관은 인간의 책임으로 비롯된 고통이나 여전히 신의 돌봄은 계속된다고 나온다.
인간은 노동의 고통 속에 경작하지만, 그것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허락받았다.
땅이 그를 거부했지만 “ אֲרוּרָ֤ה הָֽאֲדָמָה֙ בַּֽעֲבוּרֶ֔ךָ בְּעִצָּבֹון֙ תֹּֽאכֲלֶ֔נָּה כֹּ֖ל יְמֵ֥י חַיֶּֽיךָ׃ וְקֹ֥וץ וְדַרְדַּ֖ר תַּצְמִ֣יחַֽ לָ֑ךְ”
창조주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상엔 어떤 아름다움이 남아있는가?
땅은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으나 여전히 그 안에는 생명과 질서가 있었다.
이제 인간은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그러나 탁상공론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지혜가 아니라 경탄의 순간을 잊지 않고, 그 경탄을 세상에서 재창조하기 위한 노동을 해야 한다.
신이 인간에게 맡긴 동역의 초대는 여전히 유효하다.
“Admiratio est initium sapientiae.”
경탄은 지혜의 시작이다.
우리 삶은 아픔의 출처를 따져 책임을 묻기 이전에
아픔을 초월하기 위한 지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지혜는 현실에서 작동해야 한다.
세상을 황무지로 돌려놓는 우리 안의 죄성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할 책임을 지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