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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 축의 역사 (정리)

by 광규김

카렌 암스트롱의 명저 <축의 역사>를 이곳에 정리합니다.


축의 시대: 인류 정신사의 위대한 여정


축의 시대(Axial Age)는 인류가 신화적 의식에서 윤리적·철학적 자각으로 도약한 천 년 이상에 걸친 장대한 변혁의 시기였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명명한 이 시대는 기원전 800년에서 20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뿌리는 기원전 16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영향은 기원전 22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본 편에서는 축의 시대의 전개 과정을 9개의 시기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인류가 어떻게 폭력과 혼란에 대응하며 새로운 영성과 윤리를 창조해 나갔는지를 추적한다.


1장: 축의 시대 문명 벨트 (기원전 1600~900년)

아리아인의 이주와 전사 문화의 탄생

축의 시대의 서막은 러시아 초원에서 살던 아리아인들의 대이동으로 열렸다. 초기 아리아인들은 자연의 힘을 숭배하며 비교적 평화로운 목축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전차와 말의 군사적 활용이라는 기술 혁신은 이들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기동성과 파괴력을 갖춘 전차 부대는 전례 없는 군사적 우위를 제공했고, 이는 곧 폭력적인 전사 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전사 계급은 약탈과 정복을 통해 부와 명예를 축적했으며, 용맹함과 전투 기술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평화로운 농경민들은 이들의 침략 앞에 무력했고, 폭력은 사회 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폭력의 확산은 역설적으로 축의 시대의 윤리적 각성을 촉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조로아스터: 윤리적 선택의 탄생

이란 지역에 나타난 조로아스터(기원전 1500~1000년경 추정)는 이러한 폭력적 전사 문화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를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윤리적 프레임으로 해석했다. 아후라 마즈다(지혜의 주)와 앙그라 마이뉴(파괴의 영)의 투쟁 속에서, 인간은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 선택의 주체였다.

조로아스터의 혁명적 통찰은 종교를 제의적 행위에서 윤리적 선택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신을 달래는 희생 제사보다 중요한 것은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이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 최초의 종교 사상 중 하나로, 이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인도: 리그베다와 희생 제의의 정교화

인도 아대륙으로 이주한 아리아인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리그베다로 집대성된 정교한 희생 제의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제의에서 중심 개념은 '리타(ṛta)', 곧 우주의 질서였다. 사제들은 복잡한 의례를 통해 이 우주적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베다 시대의 종교는 고도로 의례주의적이었다. 제사의 정확성, 만트라의 올바른 발음, 제물의 적절한 배치가 우주의 운행을 좌우한다고 여겨졌다. 사제 계급인 브라만들은 이 비의적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제의에 대한 강조는 이후 우파니샤드 시대에 근본적으로 도전받게 된다.


중국: 상나라의 조상 숭배

중국의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경)는 조상 숭배와 샤머니즘적 제의를 국가 통치의 중심에 놓았다. 왕은 조상 신령과 소통하는 샤먼이자 제사장으로서, 점복을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다. 갑골문에 새겨진 점사 기록은 이러한 제의적 통치의 생생한 증거다.

상나라의 종교에서 특징적인 것은 대규모 인간 희생이었다. 왕의 장례식에서는 수백 명의 노예와 포로가 순장되었으며, 이는 죽은 왕이 저승에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잔혹한 제의는 주나라의 천명 사상에 의해 비판받고, 점차 인도주의적 방향으로 개혁되었다.


우주 질서의 유지: 공통된 관심

이 시기 세 문명권의 공통점은 제의를 통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인도의 리타, 중국의 천도(天道), 조로아스터교의 아샤(asha)는 모두 인간의 의례적 행위가 우주적 조화를 보존한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 중심 종교는 곧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아무리 많은 제사를 드려도 폭력과 고통은 증가했고, 이는 종교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했다.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 (기원전 900~800년)

기존 질서의 붕괴

기원전 900년경부터 기존의 사회 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기의 보급으로 전쟁은 더욱 치명적이 되었고, 제국들의 팽창은 수많은 소국들을 위협했다. 전통적인 제의와 신화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인류는 깊은 실존적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엘리야와 종교적 결단

북이스라엘에서 예언자 엘리야(기원전 9세기)가 나타나 바알 숭배에 맞서 야훼 신앙을 수호했다.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강요했고, 많은 야훼 예언자들이 순교했다.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야훼만이 참된 신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엘리야의 의의는 종교적 배타성과 결단력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는 야훼와 바알 사이에서 타협이 불가능하며, 신앙은 명확한 선택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예언자적 급진주의는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으며, 이후 아모스와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인도: 제의의 내면화 시작

인도의 현자들은 외적 희생 제의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동물을 죽이고 복잡한 의례를 행해도 삶의 고통은 해결되지 않았다. 일부 사제들은 제의의 진정한 힘이 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수행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의의 내면화라는 결정적 전환의 서막이었다. 제단 위의 불은 인간 내면의 영적 열정으로, 제물은 자아의 희생으로, 만트라는 명상적 집중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우파니샤드 시대에 완전히 꽃피게 된다.


그리스: 암흑 시대의 혼란

그리스는 미케네 문명의 붕괴 이후 암흑 시대(기원전 1100~800년)를 경험했다. 문자가 사라지고, 무역이 중단되고, 인구가 감소했다. 화려했던 궁전 문명은 작은 마을 공동체로 퇴행했다. 이 혼란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사회 구조를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이 암흑 시대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왕권이 사라지면서 더 평등주의적인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이 시기의 영웅적 가치관을 보존하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성을 성찰하는 문학적 공간을 제공했다.


불안이 낳은 탐구

이 시기의 불안과 공포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기존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진정한 종교란 무엇인가? 우주의 실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다음 시기의 획기적인 통찰들을 준비했다.


3장: 자아의 발견 (기원전 800~700년)

내면으로의 전환

기원전 8세기는 인류가 외부 세계의 신들과 우주적 질서에서 시선을 돌려 인간 내면의 도덕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종교의 핵심이 제의에서 윤리로, 집단적 의례에서 개인적 책임으로 이동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의 발견이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사회 정의

아모스(기원전 760년경)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문서 예언자로, 사회적 정의를 신학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부유한 지배층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그의 선언은 종교를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전환시켰다.

아모스는 더 나아가 야훼가 원하는 것은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라고 선언했다. 이는 제의 종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성전에서 아무리 많은 희생을 드려도,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빼앗는다면 그것은 야훼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호세아(기원전 750년경)는 아모스의 정의 신학을 보완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사랑과 헌신의 언약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자신의 불행한 결혼 경험을 통해, 야훼가 배신한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는 신임을 깨달았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라는 그의 메시지는 종교의 핵심이 의례가 아니라 관계임을 천명했다.


중국: 천명 사상과 도덕적 통치

주나라(기원전 1046~256년)는 상나라를 무너뜨리며 통치의 정당성을 설명할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그들이 제시한 것이 '천명(天命)' 사상이었다. 천명론은 통치권이 혈연적 세습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도덕적 위임이라고 주장했다. 덕이 있는 자는 천명을 받고, 덕을 잃은 자는 천명을 잃는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왕권이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조건부라는 주장은, 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폭군은 천명을 잃었으므로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나라는 요, 순, 우 같은 전설적 성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했다. 이들은 왕위를 자기 자식이 아니라 가장 덕망 있는 자에게 물려주었다고 전해진다(선양 제도). 이러한 이상화된 과거는 현실 정치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되었다.


인도: 내면의 힘

인도의 사제들은 희생 제의의 효력이 외적 형식보다 제사장의 내면적 집중과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브라만(Brahman)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는 처음에는 제의적 주문의 힘을 의미했지만 점차 우주를 관통하는 근본 실재를 가리키게 되었다.

제의의 성공은 사제가 자신의 내면에서 이 우주적 힘과 연결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이는 제의의 초점을 외적 행위에서 내적 준비와 수행으로 이동시켰다. 고행(tapas), 명상, 금욕적 훈련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우파니샤드에서 완전히 꽃피게 된다.


자아 발견의 의의

이 시기에 세 문명권이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아였다. 외부의 신들이나 우주적 힘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도덕적 능력과 책임이 종교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인간을 단순한 제의의 수행자나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윤리적 행위자로 재정의한 것이었다.


4장: 앎을 향한 기나긴 여행 (기원전 700~600년)

지적 탐구의 심화

기원전 7세기는 인류가 우주와 실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인 지적 탐구에 나선 시기였다. 단순한 신화적 설명이나 전통적 제의를 넘어서, 철학적·형이상학적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는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각 문명권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탐구되었다.


인도: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우파니샤드 시대(기원전 800~400년경)는 인도 사상사의 황금기였다. 숲속에서 수행하던 현자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의 근본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적 자아인 '아트만(Ātman)'이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는 혁명적 통찰에 도달했다. "그것이 너이다(Tat Tvam Asi)"라는 우파니샤드의 선언은 이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함축한다.

이는 여러 차원에서 획기적이었다. 첫째, 신과 인간, 우주와 자아의 이원론을 해체했다. 둘째, 외적 제의를 완전히 내면화했다. 진정한 제사는 제단이 아니라 내면의 명상에서 일어난다. 셋째, 카스트 제도에도 불구하고 진리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브라만을 깨닫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 현자들은 윤회(saṃsāra)와 업(karma)의 개념을 체계화했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끝없이 윤회하며, 이 고통스러운 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브라만과의 합일, 곧 모크샤(mokṣa, 해탈)를 깨닫는 것이다. 이는 삶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것이었다.


그리스: 폴리스와 로고스의 탄생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폴리스(polis), 곧 도시국가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폴리스는 단순한 정치 단위가 아니라, 시민들이 평등하게 참여하여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였다. 아고라(광장)에서의 토론과 논쟁은 그리스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에서 '로고스(λόγος)', 곧 이성적 논증의 개념이 태동했다. 신화와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며 설득해야 했다. 이는 철학적 사유의 기초가 되었다.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은 우주의 기원을 신화가 아니라 자연적 원리로 설명하려 했다.

폴리스의 시민은 단순한 신민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였다. 법과 정의는 신들의 명령이 아니라 시민들의 합의에 기초했다. 이는 인간을 수동적 피조물에서 능동적 창조자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한계(여성과 노예의 배제)에도 불구하고, 이는 정치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중국: 춘추시대와 예의 강조

중국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76년)에 접어들며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제후국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전쟁이 빈발했지만, 아직 완전한 무정부 상태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예(禮)'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예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규범 체계였다. 제후들 간의 회맹(會盟), 외교적 예절, 전쟁의 규칙 등이 모두 예의 범주에 속했다. 예를 지킴으로써 혼란을 억제하고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는 점점 형식화되고 공허해졌다. 제후들은 예를 표면적으로만 준수하며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랐다. 이러한 위선에 대한 비판과 예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공자의 등장을 준비했다.


앎의 다양한 길

이 시기에 세 문명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를 탐구했다. 인도는 명상을 통한 직관적 깨달음을, 그리스는 이성적 논증을 통한 철학적 탐구를, 중국은 사회적 조화를 위한 실천적 지혜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 모든 탐구는 기존의 신화적·제의적 세계관을 넘어서 인간 스스로 진리를 찾으려는 공통된 열망을 반영했다.


5장: 고난의 시대 (기원전 600~530년)

제국주의의 위협

기원전 6세기는 거대 제국들이 등장하여 소규모 국가와 부족들을 위협한 시기였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중국의 패권 국가들이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는 전례 없는 규모의 폭력과 고난을 초래했다. 축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바로 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스라엘: 바빌론 유수의 신학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파괴했으며, 유대 지도층을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바빌론 유수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였다. 성전도, 왕도, 약속의 땅도 잃었다. 전통적 신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위기 속에서 유대교는 오히려 심화되고 보편화되었다. 성전 없이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토라(율법)가 집대성되고 정리되어, 성전 제의를 대체하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회당이 발달하여 공동체적 예배와 토라 낭독의 공간이 되었다.

예언자들은 유수를 단순한 정치적 패배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해석했다. 이사야 40장 이후(제2이사야)는 유수를 정화와 갱신의 과정으로 보았다. 고난받는 종의 이미지를 통해, 무력한 희생자가 오히려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역설적 신학이 제시되었다. 이는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놀라운 신학적 창조성이었다.


인도: 두카와 수행의 체계화

인도 사회는 극심한 사회적 변동을 겪고 있었다. 도시화, 상업의 발달, 새로운 왕국들의 등장은 전통적 브라만 중심의 사회 질서를 흔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근본적인 고통, 곧 '두카(dukkha)'를 자각했다. 두카는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실존적 불안을 의미했다.

이 고통에 대응하여 다양한 수행법들이 발전했다. 요가 수행은 육체와 정신의 통제를 통해 해탈에 이르는 체계적 방법론을 제시했다. 금욕적 고행자들(śramaṇa)은 브라만 제사장들의 권위를 거부하고, 개인의 직접적 수행을 통한 해탈을 추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곧 붓다와 마하비라가 등장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힌두교의 핵심 개념인 **다르마(dharma, 법·의무)**가 정교화되었다. 다르마는 우주적 질서이자 개인이 자신의 위치에서 수행해야 할 의무를 의미했다. 카스트별, 생애 단계별로 다른 다르마가 부여되었으며,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좋은 업을 쌓고 더 나은 내생을 얻는 길로 여겨졌다.


중국: 공자와 인(仁)의 발견

춘추시대 말기의 중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예는 형식만 남고 내용을 잃었으며, 전쟁은 더욱 잔혹해졌고, 하극상이 빈번했다. 이 혼란 속에서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가 나타나 문명을 재건하고자 했다.

공자의 핵심 개념은 '인(仁)'이었다. 인은 흔히 '仁愛' 또는 '인간다움'으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훨씬 깊다. 공자는 인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곧 공감적 상상력으로 이해했다.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것이 인의 실천이다.

공자는 이를 실천적 원칙인 서(恕)로 구체화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황금률은 모든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이는 복잡한 철학적 논증 없이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도덕 원칙이었다.

공자는 또한 '자기 비움(케노시스, kenosis)'을 강조했다. 군자는 자기 이익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옳은 것을 행한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君子喻於義 小人喻於利)"는 공자의 말은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이 도덕적 성숙의 핵심임을 가리킨다.


고난이 낳은 지혜

이 시기의 공통점은 극심한 고난이 가장 심오한 영적 통찰을 낳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국가적 멸망 속에서 더 보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을 발견했다. 인도인들은 삶의 고통을 직시하며 해탈의 길을 체계화했다. 중국인들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인간다움의 본질을 재발견했다. 고난은 단순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촉매였다.


6장: 공감의 발견 (기원전 530~450년)

폭력을 넘어서는 길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은 축의 시대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인류는 폭력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공감(empathy)'의 가치를 발견했다. 자기중심성을 넘어 타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감수성이 종교와 철학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절정에 달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시민 교육의 핵심 도구였다. 비극 공연은 종교 축제의 일부로,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집단적 의례였다.

비극의 독특한 기능은 관객들로 하여금 적이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 여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한 트로이 여인들의 시각에서 전쟁을 경험하게 했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적이었던 트로이인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카타르시스(κάθαρσις)'는 단순한 감정적 정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시각을 넘어 타자의 인간성을 인식하는 도덕적 경험이었다. 비극은 전쟁의 영웅적 미화를 거부하고, 폭력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파괴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공감을 집단적으로 훈련하는 문화적 기제였다.


인도: 붓다의 자비

싯다르타 고타마(기원전 563~483년경)는 부유한 왕자로 태어났지만, 늙음, 병듦, 죽음이라는 인간 조건의 고통을 목격하고 궁전을 떠났다. 6년간의 고행 끝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붓다(覺者)가 되었다.

붓다의 핵심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된다. 첫째, 삶은 고통(dukkha)이다. 둘째, 고통의 원인은 갈애(taṇhā),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셋째, 고통의 소멸은 가능하다. 넷째,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은 팔정도다. 이는 의학적 진단과 처방의 형식을 따른 매우 실용적인 가르침이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혼자 열반에 들 수도 있었지만, 세상으로 돌아와 가르침을 펼쳤다. 이는 모든 생명에 대한 깊은 자비(karuṇā) 때문이었다. 붓다의 자비는 감상적 동정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깊은 이해에 기초했다.

붓다는 비폭력(아힘사, ahiṃsā)을 절대적 원칙으로 세웠다. 어떤 생명도 해치지 말라는 이 계율은 당시 인도 사회의 동물 희생 제의와 카스트에 기반한 폭력에 대한 급진적 도전이었다. 또한 붓다는 카스트, 성별,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혁명적인 평등주의였다.


중국: 묵자의 겸애

묵자(墨子, 기원전 470~391년경)는 공자보다 더 급진적인 사랑의 철학을 제시했다. 그의 핵심 개념인 '겸애(兼愛)'는 차별 없는 보편적 사랑을 의미한다. 묵자는 유교의 차등적 사랑, 곧 가족을 더 사랑하고 먼 사람을 덜 사랑하는 태도가 전쟁과 갈등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묵자는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처럼, 남의 가족을 자기 가족처럼, 남의 몸을 자기 몸처럼 여긴다면 어찌 전쟁이 일어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편애와 차별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을 만들고, 이것이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통찰이었다. 겸애는 이러한 구분을 해체하는 윤리적 원칙이었다.

묵자는 단순히 평화를 설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려는 곳에 달려가 침략을 막았다. 한번은 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하려 할 때, 묵자는 열흘을 걸어가 초나라 왕을 설득하고 전쟁을 중지시켰다. 이는 적극적 평화주의의 실천이었다.

묵가 집단은 엄격한 규율과 자기 희생을 실천하는 준군사적 조직이었다. 그들은 약한 나라를 방어하고, 불의한 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는 공감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한 사례였다.


공감의 보편성

이 시기에 세 문명권이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공감이 폭력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통찰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적의 고통을 느끼게 했고, 붓다는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를 가르쳤으며, 묵자는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했다. 이들은 모두 자기중심성이 폭력의 근원이며, 타자를 자신처럼 여기는 공감이 평화의 토대임을 깨달았다.


7장: 사유의 혁명 (기원전 450~398년)

비판적 이성의 등장

기원전 5세기 후반은 사유의 방식 자체가 혁명적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전통과 권위에 대한 맹목적 수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논증하는 비판적 이성이 등장했다. 이는 특히 그리스에서 두드러졌지만, 인도와 중국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는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제자 플라톤을 통해 서양 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독특한 방법은 대화를 통한 탐구였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만나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덕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엘렌코스, elenchos)은 상대방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목적은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무지함을 인정하면서("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대화 상대가 스스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고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도록 도왔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관습, 전통,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각자가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이었다. 그는 지식이 곧 덕이라고 보았다. 진정으로 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부정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다. 법을 존중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는 원칙에 따른 삶의 극적인 실증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철학자와 순교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인도: 논리적 분석

이 시기 인도에서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더욱 체계화되었다. 붓다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정교화했다. 아비달마(Abhidharma) 문헌은 인간의 의식을 극도로 세밀하게 분석했다.

불교 철학자들은 의식을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다르마(dharma, 법)들의 흐름으로 분석했다. 영구불변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라고 여기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의 일시적 결합일 뿐이다. 이러한 무아(anātman) 교리는 논리적 분석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자이나교는 다원적 관점론인 '아네칸타바다(anekāntavāda)'를 발전시켰다. 어떤 진술도 특정 관점에서만 참이며, 절대적으로 참인 진술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교조주의를 거부하고 지적 겸손을 요구하는 인식론이었다. 유명한 "장님과 코끼리" 우화가 이를 상징한다.


이스라엘: 에즈라의 율법 공포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에즈라(기원전 5세기)의 지도 아래 공동체를 재건했다. 에즈라는 토라를 공개적으로 낭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율법을 공동체 정체성의 중심에 놓았다. 이는 구전 전승을 문서화하고 정전화하는 과정이었다.

에즈라의 개혁은 유대교를 성전 중심 제의에서 율법 중심 종교로 전환시켰다. 토라 연구와 해석이 종교 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이는 지적 활동으로서의 종교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으며, 이후 랍비 유대교의 토대가 되었다.


사유 혁명의 의의

이 시기의 공통점은 권위에 대한 도전과 비판적 사유의 강조였다. 소크라테스는 전통적 신화를 질문했고, 불교는 브라만 사제의 권위를 거부했으며, 에즈라는 율법을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진리는 권위자의 선언이 아니라 이성적 탐구와 논증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을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탐구자로 변화시킨 지적 혁명이었다.


8장: 철학의 모험 (기원전 400~300년)

사상의 성숙과 체계화

기원전 4세기는 축의 시대 사상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앞 시대의 통찰들이 종합되고 체계화되어 거대한 철학적 체계들이 출현했다. 이는 창조적 종합의 시대였으며, 이후 수천 년간 인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스: 플라톤과 형이상학

플라톤(기원전 427~347년)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서양 최초의 체계적 철학을 구축했다. 그의 핵심 개념은 '이데아(Idea)' 이론이었다.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상 세계는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하며, 진정한 실재는 영원불변한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사물들은 모두 변하고 사라지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인 이데아는 영원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 태어나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기 때문이며, 이승에서의 인식은 그것을 '상기(anamnēsis)'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정치철학의 고전으로, 이상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상으로 보았는데, 이는 지혜로운 자가 다스려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였다. 또한 그는 영혼을 이성, 기개, 욕망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이성이 다른 부분을 통제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비판하며 더 경험적인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형상(form)이 질료(matter)와 분리된 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물 안에 내재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생물학, 물리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체계적 저술을 남겼으며, 이는 중세까지 서양 학문의 토대가 되었다.


중국: 장자와 맹자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년경)는 노자의 도가 사상을 시적이고 철학적으로 심화시켰다. 그는 인위적 지식과 가치 판단이 인간을 속박한다고 보고, 이를 모두 해체할 것을 요구했다. 유명한 "나비의 꿈" 우화에서 장자는 묻는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이는 주객의 구분, 현실과 꿈의 구분을 해체하는 철학적 회의주의였다.

장자는 '제물론(齊物論)', 곧 모든 것을 동등하게 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크고 작음, 옳고 그름, 아름답고 추함은 모두 상대적인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평등하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이러한 차별적 판단을 버리고 도와 하나가 되는 '소요유(逍遙遊)'에 있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경)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인간 본성의 선함을 강조했다. 그의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인, 의, 예, 지의 단서인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끼는데, 이것이 인의 단서다.

맹자는 이러한 선한 본성을 확충하는 것이 교육과 수양의 목표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정치에서 민본주의를 강조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그의 선언은 왕권에 대한 급진적 도전이었다.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는 왕은 왕이 아니라 '일부(一夫)', 곧 한 사람의 필부에 불과하므로 제거해도 된다는 혁명론까지 나아갔다.


인도: 바가바드기타

《바가바드기타》(기원전 400~200년경 성립 추정)는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 힌두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전쟁터에서 크리슈나 신과 전사 아르주나의 대화를 통해, 행위와 해탈의 관계라는 심오한 문제를 다룬다.

아르주나는 전쟁에서 친척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절망한다. 크리슈나는 그에게 카르마 요가(행위의 요가)를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다르마(의무)를 다하되, 그 결과를 신에게 맡기고 자신은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세 가지 요가를 종합한다. 지식의 요가(jñāna yoga), 헌신의 요가(bhakti yoga), 행위의 요가(karma yoga)가 모두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이는 출가 수행만이 아니라 세속에서의 의무 수행도 영적 길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이는 힌두교를 엘리트 수행자만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카스트가 참여할 수 있는 종교로 확장시켰다.


철학적 성숙의 의의

이 시기에 형성된 철학적 체계들은 이후 수천 년간 인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의 기둥이 되었고, 맹자는 유교 정통의 핵심이 되었으며,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의 경전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앞 시대의 통찰들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우주, 인간, 사회에 대한 총체적 비전을 제시했다. 축의 시대의 사상이 이제 성숙한 철학적 체계로 완성된 것이다.


9장: 제국의 시대 (기원전 300~220년)

보편 제국의 등장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거대한 보편 제국들이 등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형성되었고,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이, 중국에서는 진나라와 한나라가 통일을 이루었다. 이러한 제국들은 축의 시대의 보편주의적 사상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려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다.


그리스: 헬레니즘 철학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의 원정은 그리스 문화를 인도 변경까지 전파했다. 그의 죽음 후 제국은 분열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는 지중해와 중동 전역에 확산되었다. 이 광대한 세계에서 개인은 작고 무력한 존재였다. 폴리스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우주 시민(cosmopolitan)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년)는 불안한 시대에 개인의 평온(아타락시아, ataraxia)을 추구하는 철학을 제시했다. 그는 신들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죽음은 감각의 종료일 뿐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진정한 쾌락은 육체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이 없는 평온한 상태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제노(기원전 334~262년)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후에 로마 제국에서 크게 번성했다. 스토아철학은 우주를 이성(logos)이 관통하는 질서 있는 체계로 보았다. 인간은 이 우주적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사건에 대해서는 초연해야 한다.

스토아의 핵심 개념은 '아파테이아(apatheia)', 곧 감정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이는 무감각이 아니라, 비이성적 격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 평정심을 의미했다. 또한 스토아는 모든 인간이 이성을 공유하므로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우주 시민주의를 발전시켰다. 이는 노예제가 만연한 사회에서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중국: 법가와 유교의 국교화

중국은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의 극심한 혼란을 거쳐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를 건설했다. 법가는 인간 본성을 악하다고 보고(순자의 성악설), 엄격한 법과 가혹한 형벌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의 대표자인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233년)는 군주가 법, 술(통치 기술), 세(권력)를 활용하여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유교의 덕치론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진시황은 사상 통제를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여 유교 경전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가혹한 통치로 인해 15년 만에 멸망했다. 뒤를 이은 한(漢)나라는 초기에는 도가적 무위 정치를 펼쳤으나, 한무제(기원전 141~87년 재위) 때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화했다. "백가를 폐하고 유술만을 숭상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는 정책은 유교를 중국 문명의 정통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유교의 국교화는 축의 시대 사상이 국가 이념이 된 중요한 사례다. 그러나 이는 양면적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는 도덕과 교육을 국가 통치의 중심에 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를 교조화하고 경직되게 만들었다.


인도: 아소카의 법륜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건국되었고(기원전 322년), 그의 손자 아소카(기원전 268~232년 재위)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아소카는 초기에는 정복 전쟁을 벌였으나, 칼링가 전쟁에서 수십만 명이 죽는 참상을 목격하고 깊이 참회했다.

아소카는 불교로 개종하여, 비폭력과 자비라는 불교의 다르마를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제국 전역에 법칙(dharma)을 새긴 석주와 마애를 세워, 살생 금지, 관용, 부모 공경, 스승 존중,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 등을 장려했다. 이는 종교적 가르침을 공적 정책으로 실현한 놀라운 시도였다.

아소카의 법칙은 불교만을 강요하지 않고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강조했다. "자기 종교만을 높이고 다른 종교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그의 칙령은 종교적 관용의 초기 사례다. 아소카는 또한 병원과 도로를 건설하고, 동물 보호 구역을 만들고, 의료 시설을 확충하는 등 복지 정책을 폈다.

아소카의 치세는 축의 시대 정신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천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제국의 힘을 정복이 아니라 자비와 정의를 실현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 이상을 계승하지 못했고, 마우리아 제국은 그의 죽음 후 50년 만에 붕괴했다.


축의 시대의 종결과 유산

기원전 220년경, 중국 한나라의 안정, 헬레니즘 세계의 로마에 의한 통합, 인도의 정치적 분열은 축의 시대의 종결을 의미했다. 창조적 격변의 시대는 끝났고, 제도화와 정통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축의 시대에 형성된 사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제도화되고 경전화되어 이후 수천 년간 인류 문명의 토대가 되었다.

유교, 도교, 불교, 자이나교, 유대교(후에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발전), 그리스 철학 전통은 모두 축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자기 비움, 공감, 비폭력, 사회 정의, 이성적 탐구라는 가치들은 여전히 현대 세계의 윤리적 기초다.


결론: 축의 시대의 현대적 의의

폭력 속에서 탄생한 평화의 비전

축의 시대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은 그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시기 중 하나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전차의 발명, 철기의 보급, 제국주의의 확산은 전례 없는 살육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이 극단적 폭력이 사상가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왜 인간은 이토록 잔혹한가? 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는가?

축의 시대의 현자들이 발견한 것은 폭력의 근원이 자기중심적 에고에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와 우리를 절대화하고 타자를 배제할 때 폭력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평화의 길은 자아를 비우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한 통찰이었다.


제의에서 윤리로: 종교의 재정의

축의 시대의 또 다른 핵심 전환은 종교의 본질을 제의에서 윤리로 이동시킨 것이다. 상나라의 인간 희생, 베다의 동물 제사, 성전의 번제는 모두 신을 달래고 복을 구하는 거래적 종교관을 반영했다. 그러나 예언자들, 붓다, 공자는 모두 이러한 외적 제의를 비판했다.

진정한 종교는 사회 정의, 자비, 인간다움의 실천이었다. 아모스는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했고, 붓다는 모든 생명에 대한 비폭력을 강조했으며, 공자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仁)을 가르쳤다. 이는 종교를 사적 구원의 수단에서 공적 변혁의 동력으로 전환시켰다.

우파니샤드는 제의를 완전히 내면화하여, 진정한 제사는 명상을 통해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신화적 신들을 넘어 이성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우주적 질서(logos)를 추구했다. 이 모든 경향은 종교를 외적 형식에서 내적 변화와 윤리적 실천의 문제로 재정의했다.


보편주의의 탄생

축의 시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보편주의가 등장한 시기였다. 부족,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윤리적 원칙들이 제시되었다. 황금률은 중국, 이스라엘, 그리스에서 거의 동일한 형태로 나타났다. 붓다와 묵자는 모든 생명의 평등한 가치를 주장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 시민주의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보편주의는 현대 인권 사상의 선구였다. 카스트,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 백성이 군주보다 귀하다는 맹자의 선언, 모든 인간이 이성을 공유한다는 스토아의 사상은 모두 인간 평등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다.


개인의 발견

축의 시대는 또한 도덕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발견한 시기였다. 집단적 의례와 부족적 정체성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개인의 내면적 선택과 책임이 강조되는 시대로 전환되었다. 예레미야의 "마음에 새긴 율법", 붓다의 개인적 깨달음,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모두 종교와 윤리가 개인의 내면적 과정임을 가리켰다.

이는 개인을 집단에 예속된 존재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로 격상시켰다. 물론 이 시대의 개인주의는 현대의 원자화된 개인주의와는 달랐다. 축의 시대의 개인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었으며, 개인의 자유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분리될 수 없었다.


지속적 영향

축의 시대에 형성된 사상과 가치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유교, 불교, 유대-기독교 전통, 그리스 철학은 모두 축의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의 민주주의, 인권, 사회 정의, 환경 윤리는 모두 축의 시대의 보편주의, 평등주의, 자비, 책임의 개념에서 영감을 받았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한번 극심한 폭력, 불평등, 생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힘을 얻고,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성을 위협하는 역설적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축의 시대의 지혜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자기 비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비폭력과 정의의 실천,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이러한 가치들은 단순한 고대의 유산이 아니라,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재발견해야 할 지혜다. 축의 시대는 인류가 폭력과 혼란 속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증거다.

칼 야스퍼스는 인류가 다시 한번 새로운 축의 시대를 경험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것은 과거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축의 시대의 정신—끊임없는 질문, 자기 성찰,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창조하는 것이다. 인류가 직면한 도전들은 새롭지만, 그것을 극복할 지혜의 씨앗은 이미 2500년 전에 뿌려졌다. 우리의 과제는 그 씨앗을 오늘의 토양에서 다시 꽃피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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