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시대에 꽃핀 윤리적 각성
중국의 축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라는 전례 없는 폭력과 사회적 해체의 시기에 전개되었다. 주나라의 중앙 권력이 붕괴하면서 수백 개의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었고, 전쟁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철학적 꽃이 피어났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사상가 집단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재건하며 인간다움을 회복하려는 비전을 제시했다. 본 논고는 중국 축의 시대의 핵심 사상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며, 그것이 현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탐구한다.
중국 축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시대인 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경)의 종교적·정치적 체제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상나라는 철저히 제의 중심의 국가였다. 왕은 조상 신령과 소통하는 샤먼이자 제사장으로서, 점복(占卜)을 통해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결정했다. 갑골문에 새겨진 수만 건의 점사 기록은 이러한 신정 정치의 생생한 증거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대규모 인간 희생이었다. 왕의 장례식에서는 수백 명의 노예와 포로가 산 채로 묻혔으며, 중요한 제사 때마다 인간의 피가 신에게 바쳐졌다. 이는 신을 달래고 조상의 가호를 얻기 위한 거래적 종교관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통치권은 왕족의 혈연에 기초했으며, 왕은 조상신의 후손이라는 신성한 지위를 누렸다.
기원전 1046년경, 주나라는 상나라를 정복했다. 그러나 주나라는 단순한 무력 정복을 넘어서는 정당화 논리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늘이 수백 년간 상나라를 보호했다가 이제는 주나라를 선택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절박한 필요에서 '천명(天命, Mandate of Heaven)' 사상이 탄생했다.
천명 사상의 핵심은 혁명적이었다. 통치권은 혈연이나 무력이 아니라 '도덕적 자격'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이다. 하늘(천)은 더 이상 특정 가문의 조상신이 아니라, 도덕적 질서를 대표하는 초월적 원리였다. 하늘은 덕(德)을 갖춘 자에게 통치권을 주고, 덕을 잃은 자에게서는 그것을 거두어간다.
주공(周公)은 상나라 멸망을 정당화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상나라 왕들이 부패하고 백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하늘이 그들에게서 천명을 빼앗아 더 덕이 있는 주나라에 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전이 아니라, 정치 사상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천명 사상은 왕의 권력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메커니즘을 내장했다. 첫째, 백성의 고통이 천명 박탈의 근거가 되었다. 하늘은 백성의 고난을 가엽게 여기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만약 왕이 부패하여 백성을 억압하고 고통에 빠뜨리면, 하늘은 그 왕에게서 천명을 거두어 더 자격 있는 새로운 통치자에게 넘겨준다. 이는 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둘째, 왕은 겸손과 공순함을 유지해야 했다. 성왕이 천명을 받았을 때 주공은 그에게 "공순하고 세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미천한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백성이 하는 말에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왕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 하늘과 백성 앞에서 도덕적 책임을 지는 공복(公僕)이었다.
셋째, 무위(無爲)를 통한 권력 행사의 절제가 강조되었다. 이상적인 통치자인 순(舜) 임금은 자신의 내면적 도덕성에 완벽하게 집중하여 '무위'로 다스렸고, 그러자 세상이 저절로 변화하고 질서가 잡혔다고 전해진다. 이는 왕이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백성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도덕적으로 금기시했다.
천명 사상은 이후 중국 정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통치권은 하늘이 빌려준 것이며,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언제든 회수될 수 있다"는 원리는 왕권에 대한 윤리적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이는 맹자의 혁명론, 유교의 덕치 이념으로 계승되어 중국 문명의 정치적 DNA가 되었다.
공자(기원전 551~479년)가 살았던 춘추시대 말기는 주나라의 이상적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시기였다. 제후들은 천자를 무시했고, 대부들은 제후를 무시했으며, 가신들은 주군을 시해했다. 하극상이 일상이었고, 전쟁은 더욱 잔혹해졌다. 예(禮)는 형식만 남고 내용을 잃었다.
공자는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주나라 초기의 이상적 질서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복고주의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창조적 재해석이었다. 그는 예의 형식적 측면보다 그 속에 담긴 도덕적 정신을 강조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仁)'이다. 인은 흔히 '인애' 또는 '인간다움'으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훨씬 깊고 복합적이다. 공자에게 인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었다. 그것은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타자의 얼굴 앞에서 느끼는 측은지심이었다.
공자는 인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하여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는 충(忠)이다.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이는 자신의 욕구를 타자에게 투사하여, 타자가 자신처럼 성공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적극적 공감이다.
둘째는 서(恕)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는 축의 시대의 보편적 원리인 황금률의 중국적 표현이다. 모든 윤리적 판단의 기준을 자신의 경험에 두되, 그것을 타자에게 적용함으로써 자기중심성을 넘어서게 만든다.
공자의 인은 혈연적 사랑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효도하고 공손한 사람은 윗사람을 범하는 일이 드물고, 윗사람을 범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다." 가족 내의 인이 확장되어 사회적 조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족주의에 갇힌 편협한 사랑이 아니라, 동심원적으로 확장되는 보편적 공감이었다.
공자는 예를 단순한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면적 진정성의 표현으로 재해석했다.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예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음악이 무슨 소용인가?" 예는 인이라는 내적 덕성을 표현하는 구체적 형식이다. 형식 없는 진정성은 공허하지만, 진정성 없는 형식은 위선이다.
공자는 제사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했다. 조상 제사는 단순히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조상에 대한 효(孝)와 경(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는 신이 계신 것처럼 하라(祭如在)." 중요한 것은 외적 의례의 완벽성이 아니라, 제사 지내는 사람의 내적 태도다.
이는 종교를 제의에서 윤리로 전환시킨 결정적 변화였다. 신을 달래기 위한 희생 제사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표현하고 함양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예는 사회적 관계를 조화롭게 만드는 윤리적 규범 체계가 되었다.
공자는 '자기 비움(kenosis)'을 강조했다. 군자(君子)는 자기 이익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옳은 것을 행한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君子喻於義 小人喻於利)."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이 도덕적 성숙의 핵심이다.
공자 자신이 이를 실천했다. 그는 관직을 얻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았지만, 자신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다. 불의한 권력자를 섬기느니 차라리 가난을 선택했다. "뜻이 도에 있으면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한다면, 더불어 의논할 만하지 못하다." 물질적 궁핍보다 도덕적 타협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공자의 유교는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본질을 재발견하려는 윤리적 각성 운동이었다. 그는 폭력의 시대에 공감과 겸손, 자기 수양을 통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묵자(기원전 470~391년경)는 공자의 제자 세대에 속하지만, 유교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더 급진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그가 보기에 유교의 근본적 문제는 차등적 사랑이었다. 공자는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점차 확장하라고 가르쳤지만, 묵자는 이것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묵자의 진단은 명쾌했다. 사회적 갈등과 전쟁의 근원은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고, 자신의 가족이나 국가만을 편애하는 차별적인 마음이다. "천하의 해악이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애는 필연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구분을 만들고, 이것이 폭력을 정당화한다.
묵자가 제시한 해결책은 '겸애(兼愛, Universal Love)', 곧 차별 없는 보편적 사랑이었다. "남의 나라를 자기 나라처럼, 남의 가족을 자기 가족처럼, 남의 몸을 자기 몸처럼 여긴다면 어찌 전쟁이 일어나겠는가?" 겸애는 혈연, 지역, 국가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요구였다.
유교는 이를 비현실적이고 인간 본성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어떻게 낯선 사람을 자기 부모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묵자는 반박했다. 겸애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차등적 사랑이 전쟁을 낳는다면, 평화를 위해서는 보편적 사랑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묵자는 겸애를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원칙으로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행위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그를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은 남도 그를 이롭게 한다." 겸애는 호혜적이다. 모든 사람이 겸애를 실천하면, 모두가 이익을 얻는다. 이는 윤리를 실용주의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겸애를 말로만 외치지 않았다. 그들은 준군사적 조직으로 편성되어, 전쟁을 막기 위해 직접 행동했다. 묵가 집단은 공격받는 약소국의 성벽을 수비하고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등 실질적인 군사적 도움을 제공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하려 할 때였다. 묵자는 열흘을 걸어가 초나라 왕을 만났다. 그는 초나라의 명장 공수반과 모의 전투를 벌여, 어떤 공격 전략도 자신이 설계한 방어를 뚫을 수 없음을 증명했다. 초나라 왕은 전쟁이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침략을 포기했다.
이는 비폭력 평화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평화주의였다. 묵자는 방어 전쟁은 정당하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침략 전쟁을 막는 것이다. 묵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자를 보호했다. 이는 공감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한 사례였다.
묵자 사상은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다. 묵가들은 사치를 배격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장례 의식의 간소화를 주장했다. 음악과 예술도 실용적 가치가 없다며 반대했다. 이러한 극단적 실용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간의 정서적·미적 욕구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겸애는 인간 본성의 현실을 간과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맹자는 "묵자가 겸애를 말하지만, 그도 자기 부모의 장례는 성대히 치렀다"며 위선을 지적했다. 혈연적 애정은 인간 본성에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의 유산은 중요하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체계적인 평화주의 철학을 제시했다. 전쟁의 심리적 근거인 집단 이기주의를 폭로하고, 보편적 공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비록 묵가는 진한 통일 이후 쇠퇴했지만, 겸애 사상은 현대 평화 운동과 세계 시민주의의 선구로 재평가받고 있다.
도가 사상가들은 유교와 묵가가 공유하는 기본 전제 자체를 의심했다. 유교는 예와 덕으로, 묵가는 겸애와 절용으로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도가는 묻는다. 이러한 인위적 노력 자체가 문제의 원인은 아닌가? 인간이 만든 규범과 제도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노자(老子, 기원전 6~5세기 추정)는 인위적 지식과 가치 판단이 인간을 속박한다고 보았다.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지고, 도를 행하면 날로 덜어진다(爲學日益 爲道日損)." 지식을 쌓는 것은 자아를 강화하지만, 도를 행하는 것은 자아를 비우는 과정이다. 진정한 지혜는 앎의 축적이 아니라 집착의 제거다.
노자의 핵심 개념은 '무위(無爲)'다. 무위는 흔히 '무작위'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미묘하다. 무위는 인위적인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존중하며, 억지로 통제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비유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 짧게 줄이거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려서 길게 만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부자연스럽고 잔인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억지로 규범에 맞추려는 것은 폭력이다. "말의 머리에 고삐를 씌우고 소의 코를 뚫는 것"과 같다.
무위는 나태함이 아니라 자기 비움이다. "성인은 항상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선입견을 비우고, 상황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무위다. 이는 고도의 유연성과 민감성을 요구한다.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이 역설적 진리는 무위의 핵심을 포착한다. 억지로 힘을 써서 결과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지만, 자연의 흐름에 따를 때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물은 가장 부드럽지만 바위를 뚫는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노자의 무위 사상은 정치에도 적용되었다.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통치자가 많은 법을 만들고 많이 간섭할수록 백성은 교활해지고 사회는 혼란해진다. 최선의 통치는 백성이 통치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상의 통치자는 백성이 그가 있는 줄만 알 뿐이다. 그 다음은 백성이 그를 칭송하고 사랑한다. 그 다음은 백성이 그를 두려워한다. 최악은 백성이 그를 업신여긴다." 가장 이상적인 정부는 가장 적게 하는 정부다. 백성의 자연스러운 삶에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조화를 이루도록 내버려둔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무정부주의나 자유방임주의와는 다르다. 노자의 무위 정치는 통치자의 도덕적 수양을 전제한다. 통치자가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비우고, 진정으로 백성의 이익만을 생각할 때 가능하다. "성인은 자신을 뒤에 세움으로써 오히려 앞서게 되고, 자신을 밖에 둠으로써 오히려 보존된다." 자기를 비우는 역설이 권력의 참된 원천이다.
장자(기원전 369~286년경)는 노자의 사상을 더욱 철학적이고 문학적으로 심화시켰다. 그의 저작은 시적 우화와 역설로 가득하며, 논리적 분석보다는 직관적 깨달음을 촉발한다.
장자의 유명한 우화가 "나비의 꿈"이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이는 주관과 객관, 자아와 세계의 구분을 해체한다. 모든 구분은 인간의 제한된 관점에서 비롯된 환상이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다.
장자는 '제물론(齊物論)', 곧 만물을 동등하게 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크고 작음, 아름답고 추함, 옳고 그름은 모두 상대적인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큰 것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작은 것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천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 차별적 가치 판단을 버릴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장자는 '심재(心齋)', 곧 마음을 비우는 수행을 강조했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소리에 머물고, 마음은 형상에 머문다. 기는 텅 비어 사물을 받아들인다. 도는 오직 텅 빈 곳에 모인다." 모든 선입견과 편견을 비울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장자가 추구한 것은 '소요유(逍遙遊)', 곧 절대적 자유였다. 이는 외적 조건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태도의 변화를 통해 얻어진다. 세상의 평가와 성패에 초연하고, 생사조차 자연의 변화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고, 만물과 더불어 화합한다." 이것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 사상은 현대 과잉 경쟁 사회에 심오한 메시지를 전한다. 끊임없는 성취와 성공을 강요하는 문화 속에서, 무위는 인위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라고 권고한다.
현대인은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쓴다. 그러나 이는 학의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다. 각자의 고유한 본성을 존중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이 온다.
경쟁은 타인보다 앞서려는 '유위(有爲)'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마음이 한결같고 고요한 '텅 빈 상태'가 되어야 진정한 평화와 조화에 이를 수 있다." 경쟁에 매몰되어 불안해하기보다, 내면의 고요를 통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정신적 자유를 얻는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역설은 통제와 지배의 환상을 폭로한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관리하려 할수록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존중하는 태도가 오히려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 이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조직 관리, 환경 정책에도 적용되는 지혜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년경)는 공자의 적통 계승자로 자처하며, 유교를 더욱 체계화하고 철학적으로 심화시켰다.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 곧 성선설(性善說)이다.
맹자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는 '사단(四端)', 곧 네 가지 도덕적 싹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요,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다.
맹자는 유명한 우물 비유로 이를 설명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해한다. 이것은 아이 부모와 친분을 맺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웃에게 칭찬받으려는 것도 아니며, 나쁜 평판을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이 자발적인 측은지심이 인간 본성의 선함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가? 맹자의 답은 명쾌하다. 선한 본성을 제대로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불인인지심, 不忍人之心)이 있다." 이 마음을 확충하면 성인이 되고, 방치하면 악인이 된다. 교육과 수양의 목표는 이미 있는 선한 본성을 기르고 확장하는 것이다.
맹자는 정치 사상에서도 급진적이었다. 그는 백성을 정치의 중심에 놓았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 국가)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이는 전통적 위계를 뒤집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맹자는 더 나아가 혁명을 정당화했다. 제선왕이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묻자, 맹자는 대답했다. "인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한다. 잔적한 사람은 일부(一夫, 한 사람의 필부)일 뿐이다. 나는 일부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폭군은 왕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악인일 뿐이므로, 그를 제거하는 것은 시해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다.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와 혁명론은 이후 중국 정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군주에게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
순자(荀子, 기원전 313~238년경)는 맹자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性惡說)고 주장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 선한 것은 인위(人爲)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욕망에 휘둘린다. 이를 방치하면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다.
순자는 맹자의 우물 비유를 반박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놀라는 것은 선한 본성 때문이 아니라, 감각적 충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일 뿐이다. 진정한 도덕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과 훈련을 통해 획득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악한 본성을 선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순자의 답은 예(禮)와 법을 통한 교육과 교화다. "나무를 구부려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목수의 먹줄을 써야 하고, 금속을 날카롭게 하려면 반드시 숫돌을 써야 한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니, 반드시 성왕의 교화를 기다려야 하고 예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순자에게 예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인간 본성을 개조하는 도덕적·사회적 규범 체계였다. 예를 통해 욕망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음악을 통해 감정을 순화한다. 학문을 통해 이성을 계발한다. 이 모든 인위적 노력을 통해 악한 본성을 극복하고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
맹자와 순자의 인간 본성 논쟁은 중국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다. 이는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아니라, 교육과 정치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을 반영한다.
맹자의 성선설은 교육을 내재된 잠재력의 실현으로 본다. 교사의 역할은 외부에서 무언가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키워주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백성은 본래 선하므로, 그들의 자연스러운 도덕 감정을 존중하고 계발해야 한다.
순자의 성악설은 교육을 개조와 훈육으로 본다. 인간은 백지가 아니라 잘못된 경향성을 가진 존재다. 따라서 엄격한 규율과 반복적 훈련을 통해 개조해야 한다. 정치도 법과 제도를 통한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두 사상 모두 교육과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맹자도 본성을 기르지 않으면 악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고, 순자도 인위를 통해 선해질 수 있다고 낙관했다. 차이는 출발점과 방법론에 있다.
순자의 사상은 이후 법가(法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제자인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는 순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받아들이되, 예보다 법을 강조하는 극단으로 나아갔다. 이는 진시황의 중앙집권적 제국 건설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중국 제자백가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종교의 중심을 제의에서 윤리로 전환시켰다는 것이다. 상나라의 인간 희생, 주나라 초기의 복잡한 제사는 점차 형식화되고 내면화되었다. 공자는 제사의 진정성을 강조했고, 묵자는 장례의 간소화를 주장했으며, 도가는 제의 자체의 필요성을 의문시했다.
신을 달래고 복을 구하는 거래적 종교는 거부되었다. 진정한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변화와 사회적 실천이었다. 공자의 인, 묵자의 겸애, 맹자의 불인인지심은 모두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책임을 강조했다. 이는 종교를 개인의 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로 재정의한 것이다.
제자백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춘추전국시대의 폭력을 극복하려 했다. 유교는 도덕 교육과 예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묵자는 겸애와 적극적 평화주의를, 도가는 인위적 제도 자체의 해체를 제안했다. 법가는 엄격한 법과 강력한 국가를 통한 질서 수립을 주장했다.
이 다양한 접근법은 모두 나름의 통찰과 한계를 가졌다. 유교는 엘리트 중심적이고 변화가 느리다는 비판을 받았다. 묵자는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인간 본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가는 사회 질서의 필요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법가는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다원성 자체가 중국 사상의 풍요로움이다. 어느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지혜를 활용할 수 있다. 개인의 도덕성(유교), 보편적 공감(묵자), 자기 비움(도가), 제도적 정비(법가)는 모두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요소들이다.
중국 축의 시대의 가르침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현재적이다.
천명 사상은 권력의 도덕적 책임을 일깨운다. 현대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는 국민 주권을 실현했지만, 실제로는 권력자들이 도덕적 책임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천명 사상은 어떤 권력도 절대적일 수 없으며, 백성(국민)의 고통에 무감각한 권력은 정당성을 잃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공자의 인과 황금률은 갈등 해결의 보편 원칙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윤리적 기준이다. 혐오 발언, 차별, 폭력을 판단할 때 이 원칙을 적용하면,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답이 나온다.
묵자의 겸애는 부족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현대 세계는 여전히 '우리'와 '그들'의 구분으로 인한 갈등에 시달린다. 국가, 인종, 종교, 이념의 차이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겸애는 이러한 차별적 사랑을 거부하고, 모든 인간의 평등한 가치를 주장한다.
노자와 장자의 무위는 과잉 경쟁 사회에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끊임없는 성취 압박, 비교와 경쟁, 통제와 관리의 강박은 현대인을 지치게 만든다. 무위는 인위적 기준에서 벗어나, 각자의 본성을 존중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를 것을 권고한다. 이는 개인의 정신 건강뿐 아니라 생태 위기 극복에도 중요한 지혜다.
맹자의 성선설은 교육과 사회 정책에 시사점을 준다. 인간을 본래 악하거나 이기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은 억압적이고 불신에 기초한 제도를 낳는다. 맹자는 모든 인간이 도덕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교육과 정책은 이 잠재력을 계발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극심한 폭력과 혼란 속에서 인간다움의 본질을 재발견한 시기였다. 제자백가는 서로 논쟁하고 경쟁했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어떻게 폭력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 잠재력을 실현할 것인가? 진정한 통치와 교육은 무엇인가?
이들의 답은 놀랍도록 일관되게 인간 내면의 도덕성을 향했다. 외부의 신이나 희생 제의가 아니라, 공감, 자비, 자기 비움, 정의에 대한 감각이 종교와 윤리의 핵심이다. 제의의 시대는 끝났고, 윤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천명 사상은 권력을 도덕적으로 제한했다. 공자는 공감을 사회 질서의 토대로 삼았다. 묵자는 보편적 사랑을 실천했다. 노자와 장자는 인위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 맹자는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었고, 순자는 교육을 통한 개조를 강조했다. 이 모든 사상은 인간이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한번 폭력, 불평등, 혐오, 생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도덕성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중국 축의 시대의 지혜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제자백가가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의 질문이다. 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 타자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할 것인가? 집단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경쟁과 통제의 강박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인간의 선한 잠재력을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축의 시대의 현자들은 이미 답을 제시했다. 우리의 과제는 그 고대의 지혜를 현대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칼 야스퍼스가 희망했듯, 새로운 축의 시대는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타자에게 개방되는 태도—이것이 축의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영원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