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피하고 싶은 당신께

나를 만나는 이야기

by 광규김


감정을 피하고 싶은 당신께




어딜 가나 자기 계발, 재테크 서적과 글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최근 이 목록에 한 가지 추가된 주제가 부상했다.


"심리". 즉 마음을 다스리거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한 글을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방법론에 관한 글은 이미 식상하리만치 범람하고 있다. 명상, 내면을 들여다보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현실을 직시하기...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언제나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의 연장을 곧 "삶"이라 부른다는 것을...


그래도 사람들을 글을 찾는다. 글을 찾고 상담사와 선생님을 찾는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고,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회피하고 싶고, 어느 순간부터는 잊은 듯 괜찮아진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겨뒀던 감정은 깊은 곳에서 뿌리를 내려 비극적인 결실을 야기한다. 마음이 곪아 병이 든 것이다. 현대인들의 고질병이다. 우울증, 조울증, 그리고 번아웃까지 다양한 심리적 병리증상에 고통을 호소한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내 직업의 주된 일은 깊은 묵상을 하는 것이다.


사유함. 그것이 나의 일과였다. 명상하듯 던져진 주제에 빠져들며 떠오르는 문제의식과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차근차근 준비한다. 그리고는 적는다. 노트북이나 핸드폰이나 메모지로 달려가 냉큼 받아 적어야 한다. 그래서 내 방과 핸드폰 메모장은 수천수백 개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원고를 완성하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2주의 시간을 가지고 퇴고 작업을 거친다. 얼추 현장에서 써먹을 만큼의 작업물이 나오면 그제야 나는 글을 강단에 올려 보낸다. 혹은 정리된 자료를 가지고 내담자와 대면한다. 그들이 던진 질문, 문제와 아픔을 들으면 나는 즉석에서 답을 할 때가 있지만 이 역시 꾸준히 정립한 메모의 산물이다. 그리고 내가 겪은 조울증이란 오랜 마음의 병의 경험들이 그들의 아픔에 공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글을 지극히 사람 중심적인 글이다. 인간을 위한 정말로 사람을 위한 글을 나는 쓰고 싶은 것이다.

사역이란 일은 평생에 걸쳐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만큼 글을 많이 써야 하고 또 잘 써야 한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만 비로소 강단에 오를 자격을 받는 것이다. 이제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되고 정말 사람 같지도 않은 이들이 가운을 걸치고 단상에 서서 자신의 말을 선포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나의 일은 장로, 혹은 "랍비"와 같은 선생의 일인 것이다.



"가르치는 것. 잘 살기 위한 교훈"


흔히들 탈무드를 단지 예화가 가득한 교훈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을 틀렸다. 성경에서 기인한 랍비 유대교의 산물이며, 성전과 수도를 잃은 바리새 교파의 후예들의 경전이었던 것이다.



<유대전쟁과 요하난 벤 자카이>


기원후 66년경 총독 플로루스의 성전 성물에 대한 징수와 침탈에 반발하여 종교적 열심에 사로잡혀있던 젤롯 당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반발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티투스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아직 장군 일 때 그는 로마 최강의 10군단을 비롯한 로마 군단을 이끌고 반동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진군했다. 그로부터 4년. 루시비우 플로비우스 실바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의 성물마저 모조리 전리품으로 빼앗긴다. 이는 유대 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과, 마태복음의 예수의 예언에도 나와있다. 또한 로마의 개선문에 기록되어 있다. 사두개파와 열심당 그리고 에세네파라고 하는 쿰란 공동체 등 유대교의 4분의 3이 이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예수의 예언을 기억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와 지도자 벤 자카이의 지혜에 의해 살아남은 바리새 파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예루살렘의 참사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벤 자카이는 수도가 함락되기 전 밤중 로마군 진영으로 찾아가 자신들은 조용히 빠져나갈 테니 살려달라고 했고 로마 측은 이를 허용한다. 그리고 얌니아 지역으로 도주한 그들이 살아남아 우리가 알고 있는 탈무드를 기록한 유대교인 "랍비 유대교"의 기원이 된다.


바리새는 율법인 토라 즉 구약 성서 이외에 구두 전승의 방법을 통한 율법이 한 가지 더 존재했으며 이를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이어져 내려온 게 그들의 경전 "미쉬나"와 "게마라"이며 이 두책을 합쳐 태어난 것이 "탈무드"라는 것이다.
즉 장로들의 교훈과 지혜의 정수가 우리가 알고있는 교훈적 이야기책이 되었다.


<종교의 원래적 의미>


종교를 한자적으로 직역하면 "으뜸가는 가르침" 정도로 볼 수 있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훈 중에 자신이 받들고 공부할 최고의 교훈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과 개인의 바람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 의미의 종교가 존재했지만 21세기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선 이런 형태의 종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몇 차원 높은 "윤리"를 요구하며, 개인 혹은 공동체의 인격 도야에 포커스를 맞춘 종교가 사랑을 받고 비종교인들의 인정마저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종교인이라고 하면 "뭔가 더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어떨까? 이미 부정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교훈과는 전혀 상반된 언행으로 뭇사람을 실망시킨 종교와 종교인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으리라.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교훈"이다. 그것도 사랑에 대한 사유와 고찰을 적어보고자 한다. 대부분 문명 세계의 윤리와 종교가 지시하는 것이 한 가지 있고 이를 "황금률"이라 부른다. 내가 싫은걸 남들에겐 하지 말고 내게 좋은걸 남들에게 해줘라." 아마 도덕이 무엇이며 윤리의 본질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 해답에 대한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종결이 될 해답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이 앞에 한 가지 조건을 붙인다. "너 자신을 사랑함 같이." 스스로의 소중함을 모르는 이가 어찌 타인의 인격에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첫 번째는 먼저 사랑하라 말한다.


동양에도 그런 말이 있다.
"수신 재가 치국평천하" 유교적 가르침이 자신을 넘어 외부세계로 향할 때 이의 모범과 과정을 가장 잘 설명한 문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를 사랑해주는 법>


나를 사랑하기. 그 첫걸음은 "내가 누군지 알기"와 그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아주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이라는 과정이 정말로 중요하다. 이는 명상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

명상의 사전적 의미는 "눈을 감고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깊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묵상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 대상을 깊게 생각하는 행위" 즉 명상의 방법론 중 하나로도 볼 수 있다. 묵상은 그 대상을 특정하며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한다.

"내 감정이 버거운 나에게"의 저자 안드레아스 크누프의 말을 빌리자면, 내 감정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다.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짐짓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나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지금 내가 피하고 싶은 현실과 그 속에서 느끼는 나의 모든 마음에 집중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을 긍정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긍정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단순히 교리적 가르침을 넘어서 '내가 나로 살기 위한 방법'을 고심하여 알려주는 게 종교의 역할인 것이다. 그러기 위한 수많은 교훈이 존재하고 기독교가 추구했던 최상의 상태는 바로 "평안함"이었다.
다시 크누프의 말을 빌리자면, 마음을 받아들인 이후 느끼는 평온함이다.


나를 평가하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 실패할 수 있고 지금 힘들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최악의 상황에 몰릴 수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반응을 받아들여야 한다. 피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내 마음을 묵상해야 한다. 온전히 나만 생각하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만난다. 그 심연에 괴물이 있더라도 괴물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말해줘야 한다.


"너 참 힘들었구나."


자신의 감정을 공감해주는 것. 숨어 있던 스스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이것이 스스로를 묵상하는 방법이다.

이로써 우리는 "나"를 바라볼 수 있다. 자신을 묵상하는 것. 바쁜 일과 속에 잠이 들기 전 반복적이고, 쉼 없는 행위로 나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법. 눈을 감고 잠시만 묵상하길 바란다. 자신을 찾아야 한다. 나를 알아야 한다. 삶은 끊임없는 자아 찾기의 과정이자 그 연속이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건강한'이란 수식어를 붙여주는 행위다. 그 과정과 목표가 건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한 문장으로도 정리할 수 있는 비결들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찾아온 당신.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마주하지 못해 지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대에게


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