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게 없다면 방황이라도 할 수 있단다.”

막연한 소망 뒤집기

by 광규김

“하고 싶은 게 없다면 방황이라도 할 수 있단다.”


지난 12월 2일 수능을 앞둔 고3 제자와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었다.


100세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고작 20살도 안된 아이들에게 인생의 방향성을 정하라는 말은 가혹하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 찾기’에 열을 올린다. 마치 꿈이 없으면 하자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긴다. 꿈은 고귀하고 대단한 것이지만 그게 없으면 어딘가 결여된 사람처럼 본다. 꿈이 없다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럴 여유를 허락해주지 않았거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거나.


전자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고려하고 경험해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교육환경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의 부모와 스승 중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제시해준 방법이 없다.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저 경주마를 키우는 사육사처럼 경기에 쓰일 훌륭한 말들을 선별하는 훈련과정만 있을 뿐이다.


사실 후자의 이유도 비슷하겠다.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니 만큼 결정을 위한 과정에 도달하는 방법을 누군가 알려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외 선생은 많지만 인생 스승이 없는 것이 작금의 슬픈 현실이다. 여전히 수많은 자기 계발서는 “진정한 나를 찾기” 같은 주제에 몰두하고 수많은 글은 이미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10대의 아이들은 그걸 읽을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통계에 따르면 20대는 수험서, 30대는 자기 계발서, 40대는 재테크가 주제라고 한다. 교육에 인격도야가 없이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인 스승과 학생들을 철저하게 타자화 시킨다. 거기서 비극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다. 수능 한 번이 인생을 좌우할 시스템이 되었다는 건 비극이다. 이 처참한 상황에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문제가 논해지고 있다는 게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나 역시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부터 나눌 나의 이야기는 나의 꿈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뤄놓은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인생이란 드라마의 주인공 캐릭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나를 쓰는 법” “나의 프로필을 만드는 법” 거창한 이름이 많겠지만 제목은 역시 그게 좋겠다. “마지막 서러움 찾기”. 수많은 자기 계발 방법론 중 내가 제시할 방법이 바로 “설움 찾기”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게 뭘까? 바로

“막연한 소망 뒤집기”다.


소망 혹은 꿈이라는 게 사람에게 독이 될 수 있다면 믿겠는가? 사람이 목표와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게 단지 막연할 뿐이라면?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닌 더군다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의 방어수단이자 자기 위로의 통로라면 꿈이 그에게 문제가 된다. 매정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를 위한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살게 했던 그 소망이라는 것. 꿈이라는 그 녀석은 절대 가만있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결코 그런 이에게는 길을 보여주지 않을뿐더러 오직 준비된 사람만이 희미한 빛이 저 멀리 점멸할 때 뛰쳐나갈 수 있다. 실낱 같은 희망을 든든하고 튼튼한 동아줄로 만드는 능력. 그것이 바로 ‘무엇이라도 일단 해보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너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말들을 절대 잊지 마라. 성경엔 이런 말이 있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맥락에 따라 사용한 구절은 아니지만 그 문장이 참 아름다워 많은 이들의 문패에 적혀있는 구절이다. 지금 너의 현실은 참 초라하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너는 준비할 수 있다. 그렇다 네가 닿고자 하는 이상과 지금 그 모습 간의 괴리가 너무 커서 우울한 마음이 들지라도 나는 채찍질을 해야겠다. 시작해라. 무엇이라도. 손이 닿는 곳에서부터 차근차근해나가야 한다. 빛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게 어두울 수 있다. 그렇때는 작고 힘없는 너의 손이라도 뻗어나가야 한다.


오직 그 손 끝의 감각에 의하여서 조금씩 더듬어가더라도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두렵고 넘어지더라도 가야 한다. 기어서라도 갈 때 눈 앞엔 길이 보일 테니까. 누군가 정해놓은 왕도를 걷는 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괜찮다. 이미 식상한 응원 문구가 있지 않은가?


“너의 발길이 닿는 그 끝이 바로 네 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달콤한 말이 있더라도, 결국 모든 일은 홀로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짐이 너무 많은 현대인들에게 나는 ‘수고하고 짐 진자들이 이리로 오라’라는 이 말이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응원과 위로를 짐 지우고 싶다. 내가 그렇게 버티며 이곳까지 걸어왔듯 말이다.


어디선가 받았던 사랑이 지금의 그대를 있게 한 게 아닌가? 현실이 쓰다면 가끔은 그 모든 걸 잊고 걷게 할 당근이 필요하니까. 비극적인가? 그래 봤자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면 뭐 어떤가. 그대는 이렇게 그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잖은가. 잠시 멈춰도 쉬었다 가는 시간도 그대의 여정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 잘했다. 적어도 이런 글을 따라서 왔다는 건 그 마음엔 아직 작은 불씨나마 남아있으니까.


아직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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