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당신은 뉴스를 보고 소망을 품는가? 이땅에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경건한 기독교인이 빠지기 쉬운 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적 패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와 기업이 주도하는 환경 오염이 심각하다해서 개인의 노력마저 중단하라는 말이 옳은 말인가?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 의미가 없는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정신을 계승하는 많은 이들은 국가와 사회를 기독교적 사랑에 입각한 올바른 세상으로 이끌어가기를 소망했고, 많은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가 그리스도의 법에 복속하리라 바랬던 종교적 도덕주의자의 비현실적인 소망은 패배주의나 감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예수의 승천 직후의 초대교회는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던 계시의 완성은 끝을 모르고 연기되었고, 교회가 사회적 책임 앞에 섰을때 부조리한 사회 제도와 기독교적 이상 사이의 괴리 앞에 그들은 침묵과 무기력한 수용으로 답하게 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만 일어난다.”라 말하는 자연적 결정론에 천착한 신앙은 어떠한가? 그들의 말에 따르면 죄악을 일삼는 국가 지도자와 비리에 젖은 종교 지도자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핑계하에 정당화된다. 자기가 복음을 잘 믿기만 하면 세상에 영향을 준다 생각하는 감상주의와 심판 앞에선 악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자연적 충동을 방관하자는 패배주의. 그리고 이분법적 세계관에 눈이 멀어버린 이상주의자는 결국 눈앞의 현실에 도전할 야성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강단에서 말씀 선포가 바로 서면 교회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게 아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사회의 변혁을 일으키려한 농민들이 학살 당할때 개혁자 루터는 침묵했다. 그의 저서 work, vol. 3의 237p를 보라. “…하지만 세상을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다스리기에 앞서 세상을 참된 기독교인들로 가득 메우도록 노력하라. 당신들은 이 일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과 대중은 앞으로도 계속 비기독교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버는 루터가 사회 문제의 다툼에 있어 패배주의와 감상주의를 연결시키며, 세상이 황금률을 준수하면 사회 문제는 해결되리라는 주장을 했다 말한다. 그리고 루터는 이러한 이상을 세상이 지키지 않을때 이들을 포기했다. 세상을 악하다 말하는 교회치고 복음의 이상과 대립하는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과 국가적 부조리에 맞서는 곳은 몇 없다. ‘어쩔 수 없다.’ ‘예전부터 그래왔다.’ ‘관행이다.’ ‘내가한들 바뀌는건 없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며, 나와 그대가 해선 안될 말이다. 또한 사랑하는 우리의 동역자들이 빠지게 둬서는 안되는 생각이다. 악한 욕망이 득세한다면 이를 초월한 종교적 이상 없이 어느 누가 도전할 수 있겠는가? 전쟁은 하나님께 달렸고 일의 결국은 주님의 손으로 완성되겠지만, 성경은 창조의 이야기 곧 문화 명령을 받은 아담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시겠지만, 그 선한 계획에 동참할 사람 없이 일하시지 않으셨음을 말한다. 내게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많지만 아직도 사랑하는 교회를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고 아직까지 순교의 꿈에 겨우 메달려있는게 아니다. 오히려 나의 존재론적/실존적인 한계를 마주했을 때, 나는 예수의 이상을 보았고, 나를 온전히 던져 현실에 살아가라는 믿음 하나만을 가졌을 뿐이다. 나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오직 소망으로 산다. 내가 일한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음을 느꼈기에 나로서는 지킬 수 없는 고결한 소망으로 미련하게 죽기까지 살기로 작정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