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by 광규

<모이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이지 않는 시간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여러 유형으로 갈렸다. 잠룡처럼 때를 기다리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는다. 심해를 헤엄치는 고래처럼 오래 숨을 참고서 정 죽겠다 싶을 때 사람 보기를 강구한다. 사람이 그리운 시기다. 사람 귀한 줄 아는 시대는 아니다. 여전히 과로를 견디지 못한 비루한 심장은 터져 피를 뿌린다. 피는 눈물이 되어 주변인의 볼을 타고서 턱 끝에 맺혀 떨어진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어떤 교회로 존재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존재론적 물음 앞에 서있다. 그동안 교회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본질에 다가갈수록 산통을 겪는다. 불필요한 불순물을 덜어내는 과정은 언제나 아픔을 낳는다. 그리고 그중에서 정말 귀하고 사랑하는 지체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도 일어나곤 한다.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는 교회는 지금이야말로 인간의 편에 서서 변증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사람 중한 중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여전히 죽어가는 일꾼들, 병마와 씨름하는 생존 싸움 속에서 교회는 사람의 편을 들었어야 했다. 왜 그런 줄 아는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였다면 진즉 그러셨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추태가 드러났고, 간악한 꼬리 자르기는 우리가 얼마나 책임감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감발 했다.

우리는 세상에 고발당했다. 마치 복음이 외식하는 자의 위선을 드러냈듯이, 신앙인의 위선은 언제나 공의의 송사 앞에 벌겨벗김을 당할 뿐이었다.

교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교회는 가장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공평과 정의 앞에서 누구보다 먼저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 말은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서있어야 했다는 말이다.

가장 정의에 민감하고 사랑에 촉각을 세우는 교회가 되었어야 했다. 이웃이 우는 곳에 교회가 있어야 하며, 지체가 지친 곳에 교회가 있어야 했다. 교회는 꼬리가 없어야 한다. 다만 그 팔과 다리로 힘껏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이 비록 교회의 실책을 당기는 일이라도 그럴지라도 그래야 한다.

가장 부끄러워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한다는 말이다. 모이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가 협력하는 시간 동안 성령이 함께하사 선을 이룰 테니까.

선한 영향력.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잣대이며, 교회의 진정한 존재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