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장례절차도 마무리하지 못했는데 벌써 봄이가 하원시간이 다되어갈 것 같다. 어린이집 버스가 집으로 데려다 주기 전에 어린이집에도 빨리 알려야 한다.
아무도 없는 집이 아닌, 아빠가 있는 이곳으로 데려와야 한다.
감사하게도 직장동료가 차로 픽업해서 데려와주신다고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
수화기너머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목이 메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 봄이 아빠가 하늘나라에 갔어요.”
“네?....................”
“이따가 저랑 일하는 회사 직원이 데리러 갈 거예요.”
“네,,,,어머니.”
그러고는 조금씩, 다시 선생님께 다시 전화가 왔다.
어린이집에 계신 원장님과 다른 선생님들께 이야기를 전하다가 헷갈리신 것 같았다. 설마 잘못 들었나 생각을 하셨는지 다시 물으셨다. 아마 아빠라는 말이 봄이 아빠가 아니라, 나의 친정아빠를 잘못 들은 건지 착각하신모 양이었다.
“어머니, 아까 제가 잘 못 들었는데, 봄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가요?”
“아니요. 봄이 아빠요.”
아무 말씀을 못하셨다.
“................”
“4시 반쯤 데리러 갈 거예요. 조금만 데리고 있어 주세요.”
“네....... 어머니....”
그때 막 장례식장 직원이 남편의 사진을 제단에 갖다 놓았다. 이제 국화꽃도 놓였다. 봄이 아빠에게 인사할 준비가 조금씩 되어가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나서 봄이가 왔다. 봄이는 그렇게 회사 직원이랑 해맑게 장례식장으로 와서 나에게 안겼다. 봄이는 그렇게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장례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나이에 아빠의 장례식에 초대되었다.
지금 7살 봄이가 만약 아빠와 헤어져야 했다면 나처럼,,, 혹은 나보다 더 긴 시간을 아파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초등생이상 자녀를 둔 사별 가족들이 아이들과 함께 몇 년을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못하기도 하는 경우를 봤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봄이는 그저 할머니와 엄마가 있고, 엄마 회사 친구이모가 데리러 와서 기분이 좋은 3살 아가였다. 엄마 친구는 엄마친구이모, 아빠 친구는 아빠 친구삼촌이라고 불러주면 알아들을 그런 나이. 아직도 어린이집에 다닐 때도 우유를 젖병에 넣어서 마셔야 하는 나이.
아빠 사진을 보고도 왜 사진이 거기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나이. 아직 할머니와 엄마가 왜 하얀 머리핀을 꽂고, 검은 한복을 입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는 그런 나이 3살.
이따가 아빠친구이모가 와서 이모집에 간다고 얘기해 주니 기뻐했다. 이모집에는 봄이가 평소 좋아하는 언니들이 둘이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외동인 봄이는 아빠엄마와 헤어져 두 밤을 자야 한다고 얘기해 줘도 그저 신나 했다.
그렇게 봄이를 보내고, 어른들은 장례를 치렀다. 3일 동안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잠을 잤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3일 동안 두 시간정도 잔 것 같다. 잠을 잘 수조차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제 남편은 정말로 영영 떠나버릴 사람이니 말이다. 잠은 남편을 보내고 나서도 실컷 잘 수 있으니 말이다. 냉동실에 차갑게 누워있을 남편을 두고, 우리끼리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내가 보러 오길 기다리고 있을지, 떠나고 싶지 않아하진 않을지.,,,,
다음날, 오전에 봄이 아빠를 만나러 갔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장례식장에 갔을 때, 제일 비싼 옷으로 입혀주시라고 골라주었다. 제일 비싸고 좋은 관으로 해달라고 했다.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제일 좋은 걸로 해주고 싶은 마음은 모든 유족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남편은 키가 180이 넘는다. 그래서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관이 더 비싸다고도 했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봄이 아빠를 보러 갔다. 장례식장이 몇 층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건 봄이 아빠는 1층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다리가 떨리고 힘이 없어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앞을 보지도 못하고 부축을 받으며 땅을 보며 봄이 아빠를 만나러 갔다.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봄이 아빠가 차가운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람이 숨을 쉬고 표정을 짓고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 숨이 끊어져서 표정도 없고 혈색이 없을 때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 보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사할 수 있도록 아직 손은 천으로 싸고 있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봄이 와 나에게 웃어줄 것 같은데, 손을 잡아 주며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줄 것 같은데,,, 그냥,,, 표정 없는 얼굴로 혈색이 하나도 없는 다른 사람 같은 얼굴로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새벽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등뒤에서 어깨에 손을 올려주고 있을 것만 같다. 떨리는 내 어깨를 잡아주고 울지 말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을 것만 같다. 남편이 내 눈물을 아무리 닦아줘도 닦아지지 않고, 턱 밑까지 흘러서 떨어지고 있겠지만 말이다.
남편의 손은 많이 차가웠다. 키도 크고, 눈도 크고, 발도 크고 잘 생겼던 남편은 이제 그렇게 떠나야 한다. 시외숙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울면 봄이 아빠가 더 편히 떠날 수 없다고, 잘 쉬라고 인사하고 보내주라고 말이다. 아직 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외숙모님 말씀이 참 냉정하게 들렸다.
“봄이 아빠..... 이제 편히 쉬어.”
“고생했어.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잘 가... 봄이 내가 잘 키울게.....”
“미안해... 함께 가주지 못해 미안해”
어머니도 인사해 주셨다.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그 누가 알까..
“잘 가라 우리 아들,,, 잘 가라 종화야....”
“엄마가 미안하다.”
마지막 인사시간은 참 짧게 느껴졌다. 아직 할 말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아직 보낼 수가 없는데 남편의 얼굴에는 천이 써졌다. 그렇게 하면 숨을 못 쉴 거 같은데,,,,
그렇게 돌아와서도 한창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때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멀리 광주까지 와준 내 대학동기들이 날 보던 눈빛이 아직 선하다. 행여 내가 쓰러질까 봐 떠준 물도 내팽개쳤다. 그러자 누군가의 손수건에 물을 묻혀서 입술을 적셔주었다.
둘째 날 밤에는 남편을 평소 아끼던 지인들이 남편의 추모식을 열어주었다. 인원이 많아서 다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방에 준비해 둔 화면으로 본 사람들도 있었다. 장례식에 오신 분들 중에 국회의원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 준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밤새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남편이야기를 하며 울고 웃었다.
아직 보내지 못할 것만 같은데 야속하게도 시간은 흘러 마지막날이 되었다. 남편은 화장터로 들어갔다. 남편은 하얀 재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키가 컸던 남편은 작고 하얀 통에 담겨서 우리에게 왔다.
이제 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아빠는 어디 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 차로 봄이가 있는 곳으로 데리러 갔다.
멀리서 엄마품을 향해 뛰어오는 아이를 보며 울 뻔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봄이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봄이도 봄이 와 3일 동안 함께했던 아이들도 아쉬워했다.
금방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봄이를 봐주었던 고마웠던 남편친구 부부에게 아직 찾아가지 못했다. 3년 반이 지나고 있지만, 아직은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가지를 못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촌언니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봄이 와 집으로 돌아왔다. 온기도 하나도 없는 집이 어둡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 날밤 그 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난,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도 기억하면 좀 편하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세 달 정도는 집을 비워두고 다시 가지 못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세 살 어린 아가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던 걸까. 장례식에 처음으로 와봤지만, 장례식이 뭔지도 모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봄이는 묻지 않았다. 왜 아빠가 오지 않느냐고,,,, 그냥 뭔가를 찾는 듯하더니, 아빠랑 놀던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트램펄린 아래쪽 공간에 들어가서, 한창을 나오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얼굴을 바닥에 대고 슬픈 표정으로 그냥 가만히 엎드려있었다. 봄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나도 차마 다가갈 수 없었다.
그 뒤로 아빠를 찾는 아이에게 1년 넘게 멀리 일하러 갔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영상통화로 모습을 볼 수도 없는 아빠를 한동안 많이 기다렸다. 아빠의 빈자리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 아이로 너무 씩씩하게 잘 자라주고 있다. 어쩌다 가끔 아빠가 보고 싶다고 울기도 하는 아직 7살이지만,,,,
5살 무렵 둘이 함께 갔던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봄이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가야, 너 아빠가 참 예뻐하겠다.”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 앞에서 아이 아빠가 없다는 걸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지, “네” 하며 거짓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때 봄이가 먼저 말했다.
“아빠 하늘나라 갔어요.”
아주머니가 당황하시며 내 눈을 쳐다보시길래, 나는 사실이라고 눈으로 말씀드렸다.
봄이는 나보다 강한 아이이다.
3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갑작스레 아이 아빠에 대해 묻거나 할 때 가슴이 철렁하고 마음이 울컥하기도 한다. 그런데 봄이가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한다.
“아빠 돌아가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