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은 축복 Aug 09. 2023

평범한 불행


20대, 30대 누구나 결혼을 꿈꾸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평범한 일상을 꿈꾼다. 나도 그랬다. 남편과 나는  골목길 주택 생활을 꿈꾸며 직접 우리 손으로 벽에 예쁜 파스텔 색상의 페인트칠까지 해가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처음 연애할 때부터 주택에 사는 게 꿈이었다. 도심 속 낡은 2층 주택이었지만, 정겨운 이웃의 정이 있는 그곳에서 시작을 했다. 옥상에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옥상 텃밭을 가꾸었다.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를 키워서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1층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무인카페 겸 공간을 운영했다. 푸들 강아지도 한 마리 키웠다.


아주 잠깐이지만, 신혼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외국인 전용 게스트하우스도 운영을 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손님들과도 우리 부부의 꿈을 나누었다. 언젠가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찾아가리라 약속을 했다.


우리가 선택한 그곳은 마을에 평생을 거주해 오신 어르신들이 사는 동네라, 시골 같은 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라는 것은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다 아는 그런 곳이다. 이 동네가 꼭 그랬다. 우리 부부는 그곳에 살면서 부부싸움도 소리 내어해 본 적이 없었다. 행여 주변 어르신들이 들을까 봐 문자메시지로 소리 없는 언쟁을 하기도 했다. ​


그리고 셋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남편은 우리를 떠났다.


남편은 프리랜서로 청소년들을 만나고 이끄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늘 열심히 바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또 건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남들처럼 사는 게 꿈이었다. 힘든 어린 시절, 청소년기를 보내고 겨우 찾은 안정감이었다.  어릴 적 겪은 성폭행과 성추행으로 25년 동안 트라우마를 겪으며, 내 삶은 늘 죽음과 가까이 지내왔었다. 그랬었기에 남편은 내 눈에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며 전쟁 같은 육아를 하며 그렇게 살았다. 난 그렇게 사는 게 꿈이었다. 난 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일 거라는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을 겪으며 살아왔었다. 그렇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상이었기 때문에 남들은 피곤하고 어려워하는 육아였지만, 나는 너무 행복했다. 평범이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서 찾기 어려웠던 단어이지만, 이제야 좀 그 단어처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들이 보통 산후 우울증을 겪으면 그 영향이 고스란히 아이에게도 미쳐서 아이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난 아이빠가 멀리 떠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아이에게 나의 좋지 않은 기분을 그대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이가 3살이던 해 겨울이 되기 전,,, 그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이제껏 날 괴롭혔던 기억에서 이제 막 벗어나서 진짜 내 인생이라고 믿는 것, 남들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나에게 2년도 안 되는 짧은 행복은 끝났다. 더 이상의 불행이나 어려움은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루아침에 날 집어삼켜버렸다.


그 행복이 끝나기 며칠 전, 우리가 키우던 푸들 강아지 토토도 집을 나갔다. 주택 대문을 열어두면, 산책을 하다 돌아오곤 했는데, 보름째 돌아오지 않았다. 동물들은 미래를 미리 안다고도 하더니, 이 작은 동물은 남편이 떠날 걸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남편이 떠나면 나머지 주인인 나도 자길 돌볼 여력도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믿을 수가 없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 일이 내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도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행은 언제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불쑥 우리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날도 여느 평범한 날인 줄만 알았다. 남편은 술을 참 좋아했다. 예전에 살던 집이 잠깐 비어 있어서, 남편은 밤늦게까지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거기서 잠을 자고 있었다.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도 아이를 등원시키고 출근하느라 바쁜 아침을 보내고 여느 날처럼 오전 회사업무를 보고 있었다. 점심정도에는 사과의 한마디와 함께 연락이 오겠지 하며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아침에 약속을 했던 남편 후배가 남편과 연락이 되지 않자 찾아갔던 것이다. 그 후배에게서 이미 남편은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119에 신고를 했다. 아직 숨 쉬고 있지 않을까,,,,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그리고는 내가 어떻게 운전을 하고 그곳을 찾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을 만나러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그냥 밖에 앉아 있었다. 남편의 마지막 모습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난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봤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버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있는 그대로의 남편의 마지막을 보지 않아서라고,,, 물론 장례식에서 멋있게 단장하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를 외면할 수는 없었지만,,,

이전 01화 시작하는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