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막으려는 수많은 대책과 구호가 난무한다.
그러나 생을 포기하려 한 이의 깊은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조차 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밖에서 보기에 별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이유들이 삶을 포기하게 만들 듯
보잘것없는 작은 것들이 또 누군가를 살아있게 만든다.
삶과 죽음은 불가해야 하는 것이다.
어스름한 미명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내민 손이 고마워서
모두가 떠나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버텨온 자신이 불쌍하고 대견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 유 퀴즈 온 더 블럭 157회 ‘똑바로 살기‘편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박주영 판사 -
청년들에게 쓴 이 판결문 하나로 법정을 울리고 세상에 울림을 주시는 분으로 유명하다. 2019년 울산 3인 자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판사님은 이들이 또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삶의 의지가 될 만한 얘기들을 만들어 줘야겠다 생각하고 그 방법을 계속 강구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편지, 책 두 권, 용돈 20만 원을 선물하며 이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생각하게끔 만들었다고 했다. 청년들에게 썼던 편지 중 한 구절은 이러하다.
설령 앞으로 채워갈 여러분의 이야기가 애달프다 해도 이야기는 절대로 도중에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못다 한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합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날을, 앞으로 누릴 날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따뜻하고 감사한 일화다.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이유들을 판사님이 일깨워주신 것이다. ‘힘내‘라는 말 한마디보다 함께 있어주고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는 것에 더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순간이 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기대고 싶기에 용기 내어 이야기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 힘내‘라는 말이 마음에 닿지 않고 공기 중으로 가벼이 날아가는 순간들이 많다. 섣부른 응원은 그만 하자.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눈빛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마음이다. 경청이 어우러졌다면.
박주영 판사는 ‘판사는 마지막에 선 사람이다. 판사가 쉽게 무너지거나 부러지면 자유, 인권, 생명이 하찮게 여겨질 수 있고 함부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게 판사다 ‘라는 생각을 전했다.
우리 엄마들이 끝까지 아이 뒤에서 버티고 보호해주는 판사 역할을 해야 함을 알았다. 나는 지금 어떤 엄마인가?
듣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제대로 듣는다면.
끊임없이 상대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 너무나 큰 에너지가 든다. 위 판결문 문구처럼 잔인하게 혼잣말하지 않게 하는 것. 그렇게 경청을 받아본 사람은 또 누군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줄 준비를 하게 된다. 엄마에게서 이런 경청을 받아본 아이는 또 다른 이의 말에 진심을 다해 들어준다.
“엄마는 풀고 싶어서 들어오는 거 알아.”
“근데 엄마가 처음 들어와서 하는 말은 '나는 화나고 속상한 게 있으니까 일단 너는 들어'라고만 느껴져,”
“처음부터 오해나 풀고 싶은 부분을 얘기해줘”
“엄마 기분부터 말하거나 나를 몰아넣는 말을 시작하지 말고.
“솔직히 질문 계속하면서 엄마 마음만 얘기하는 게 나는 그냥 밀어붙이는 거로만 느껴져"
한쪽 코너로 밀고만 있었구나. 이 모두 딸이 풀자 들어간 엄마에게 느낀 솔직함을 전해 준 글이다. 이 글로만 보면 나는 죄를 취조하는 사람이다. 톡으로 이 내용을 받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에. 부끄러웠다.
입장을 변호하는 행동만 계속해왔던 내 모습이 겸연쩍었다. 내가 꽤나 잘 소통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한 템포 숨 고르기를 하고 상대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구나. 내 아이 문제라서 성급한 어미 마음인 걸까. 그냥 급한 내 성격 탓일까. 그토록 잘 들어주는 엄마인 줄 착각하고 있었는데 현타가 왔다. 착각도 자유라고. 그동안 자신에 대해 꽤나 과대평가를 해왔다. 나 자신에게도 내 아이에게도 솔직해지자.
네가 그동안 많이 외로웠겠구나. 일방적인 나의 말로.
다시 아이의 말을 들을 준비를 해야겠다. 서두르거나 성급하지 않게. 그동안 내가 진심으로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음을 인정하자. 그동안 했던 건 진짜 소통이 아녔음을. 우리 아이는 말보다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게 뛰어난 친구다. 말을 하고 한 템포 쉬고 다음 말을 해야 하는 아이인데. 잠시 쉬고 있는 그 한 템포에. 급한 엄마가 먼저 이야기를 해버릴 때가 많았구나. 나의 소통에 진짜 문제점을 아이가 콕 집어 알려주었다. 숨 고르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책읽어드립니다’(tvN)에서 임상심리학자 김태경 교수는 “힘든 사람에게 가장 하면 안 되는 말이 ‘힘내’라는 말인가요?”라는 패널의 질문에 “힘내라고 말해서 힘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힘내라고 말하지 않아도 힘이 날 거예요.
묻지 마 살인사건으로 딸을 잃은 한 아버지를 만났는데 이분이 가장 고통스러운 게 사람들이 자꾸 얼굴을 보면 위로하기 위해 달려와 하는 ‘힘내라는 말’이었다고. 마음을 무시할 수 없어 반응하지만 마음으로는 그조차 부담스러운 상황. 위로의 말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데 왜 사람들은 위로하려고 할까? 그 이유는 사실 본인이 위로하고 싶어서, 자기욕구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보다 강한 효과적인 위로는 곁을 지켜주며 함께 버텨주는 것이라고.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때그때 맞춰서 손이라도 한번 잡아주고 따뜻한 물이라도 한잔 주고 이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싸구려 칭찬, 진지하지 않은 아첨은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진정한 인정을 갈망한다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