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E-17] 70년 개띠 아재 은퇴기

성격 차이? 취향 차이?

by 딸삼빠

흔히들 하는 얘기가 있다. 은퇴 후 남자는'아내와 함께' 시골에서 전원의 삶을 꿈꾸지만, 정작 아내는 도시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하지만, 아마 우리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결혼 후 부부는 서로를 닮아간다는데, 닮은 사람에게 끌린다는 연구나 실험도 있듯 원래부터 닮은 사람들이 만나기도 하겠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 맞춰 보다보니 서로 성향이나 취향도 닮아가는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아내와 나도 비슷한 면이 많다. MBTI도 비슷하고, 낭비하지 않는 경제관념도 비슷하다. 물론 차이도 있다. 오늘 얘기는 이 차이에 초점을 맞췄다.


은퇴 후 내 개략적인 계획은 아내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한 달 살이를 하면서 지내는 것이었다. 은퇴 후에는 건강보험료가 부담이 많이 된다고 하니, 3달은 해외에서 1달은 국내에서 지내면 좋겠다 싶었다. 아직 아이들이 대학생들이고 현금흐름이 내 계획대로 진행이 될지 확인도 필요하니, 처음에는 동남아시아의 가성비 여행지부터 시작해서, 동유럽, 북미와 유럽 선진국으로 서서히 넓혀가면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 핵심은 '아내와 함께'였다. 내가 홀아비도 아니고, 나 혼자 여행 다니는 게 무슨 재민가. 난 '외로움'을 즐기는 고수는 못된다. 그래서, 아직도 정년이 15년 이상이나 남은 아내에게, 나와 함께 빨리 명퇴를 하자고 졸랐다.


이 지점에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난 일하는 게 싫었다. 내 25년여의 직장생활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벌이, 그 외는 약 10년의 노동조합 활동이 의미였다. 소위 대기업의 '이사'와 비견할 '교무위원'이 될 수도 없었지만,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누가 알아준다고. 하지만, 아내는 일에 의미를 갖는다. 대학 4학년 때 일찍 결혼하고, 다음 해부터 시작한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아내는 슬슬 명퇴를 미루었다. 예전의 나는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꼈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놀고 멍하게 쉬는 것'에 대해 관대하려 노력한다. 반면, 아내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TV와 유튜브를 보는 것이 불편한 것 같다.


난 비행기 타고 나간 김에 길게, 장기간의 해외여행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피곤해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래서 난 1999년에 스노클링을 하러 잠시 들렀던 피피섬이 너무 좋아서 신혼여행으로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 해외는 피곤할 것 같다는 아내 말에 그냥 제주도로 갔었다. 잊고 있었다. 그런데, 결혼 후 10개월간의 캐나다 생활, 40일간의 유럽여행, 16일간의 미국 동부여행, 역시 16일간의 미국 서부여행, 9일간의 록키여행을 '즐겁게, 잘'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건, 자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였던가 보다. 그러고 보니, 지난 25년간 내가 여행을 가자고 얘기하면 그냥 나와 함께 집에 있는 게 좋다거나, 아이들이 좀 큰 후에는 아이들 일정 때문에 어렵다고 하거나, 업무가 많아 휴가를 낼 수 없다고 했던 것이 그런 이유였던가 싶다. 헐,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물론, 아내는 늘 자신도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던 이유도 있다.


취미가 별로 없는 내가 그나마 좋아하는 건 자전거 타기인데, 아내는 자전거를 탈 줄만 안다. 하루 50~100km 자전거 여행은커녕 20km도 쉽지 않다. 난, 수영이나 스노클링도 좋아하는데, 아내는 수영을 못한다. 난 장을 보러 간다던지 하는 목적이 있는 걷기는 괜찮지만 운동삼아 산책을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아내는 매일 걷는 같은 길도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난 김기덕의 엽기적인 작품들도 대부분 봤고, '악마를 보았다'나 좀비물, SF, 무협, 액션을 가리지 않지만, 아내는 일단 피가 나오는 거, 허황된 건 싫어한다. 요즘 아내와 내가 같이 보는 건, '나는 솔로' 정도. 내가 거실에서 TV를 보면 아내는 소파에 앉아서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보고, 아내가 본격적으로 TV를 보면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이제 곧 아이들도 우리의 곁을 떠나서 독립을 할 테고, 우리 부부는 30년에서 어쩌면 50년까지도 함께 할 시간이 남았는데, 이거 정말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