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일단, 여기까지. 멈춤)
내 기억 속의 집은 상도동, 외발산동, 신월동, 사당동의 집이다. 특히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2001년 32살 결혼하기 전까지 24년간 살아왔던 사당3동 167번지 38호 24통 2반의 멋대가리 없고 낡은 2층집이다. 부모님이 2006,7년까지 사셨던 그 집은 이젠 사라졌다. 동네도 사라졌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되었다. 카카오맵 로드뷰의 과거 거리 모습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작은 골목 안에 있던 우리 집 앞으로는 로드뷰 화면을 이동할 수 없어서, 큰길에서 비스듬히 볼 수밖에 없다.
집 앞 골목에서 처음으로 축구공이라는 걸 동네형들이랑 해 봤던 추억, 손으로 공을 잡으면 안 된다고 욕먹던 기억, 그 골목이 어른이 되고서는 자동차 두 대가 엇갈려 지나갈 수도 없는 좁은 골목이었다는 깨달음까지, 다 사라졌다.
집 앞에는 미용실이 있었고, 골목 왼쪽 끝에는 '소원약국'(나중엔 한독약국으로 약사와 이름이 바뀐)이, 오른쪽 끝에는 중국집과 문방구와 슈퍼가 있었는데. 큰 골목으로 2개 블록 정도 가면 중간에 목욕탕이 있었고, 4,5개 블록 정도 내려가면 마당에 탁구대가 있어 부러웠던 웅진이네 집이 있었는데. 더 옛날 국민학교 다닐 때, 서쪽 언덕 위에는 아파트 대신에 물지게를 지며 나르던 판잣집들이 있었고, 동쪽에는 단독주택들과 함께 빨간 진흙투성이의 흙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내가 살던 집과 동네를 기억하면, 한없이 쓸쓸해진다.
문득 평생 아파트에서, 그것도 자주 이사를 다녔던 사람들에게 고향, 우리 집, 내가 살던 곳에 대해서 어떤 기억이 있을지 궁금하다.
유럽에 가 보면, 100년도 전에 '그 빈센트 반 고흐'가 살고 그렸던 집과 동네가 현재에도 '그 그림'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데, 지난 100여 년간 일제강점과 독립, 전쟁과 산업화를 겪은 우리나라는 거의 예전과 같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렵다. 몇 년 전부터는 선진국의 대열에 들었다는데, 이제는 우리도 지킬 것은 지키고 남길 것은 남길 수 있게 될까. 개발도 좀 줄고, 이사도 좀 덜하게 될까.
내가 집을 짓고 싶어 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아마 '변하지 않는 한 가지를 나와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은 이미 지구단위 계획 안이기 때문에 어제까지 산과 들이었다가 오늘은 아파트 숲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옆에 경희대학교가 있으니 학교도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이들이 결혼 후에도 세 딸 중에 누구라도 이곳에 계속 이어서 살아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묘를 쓰는 대신 점차 화장으로 바뀌고 있는데, 화장 후에 시에서 운영하는 납골당에 모시거나 수목장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경남 거창 선산에 더 이상 묘를 쓸 자리가 없는 걸 아는 아버지는, 화장해서 그냥 부모님 묘 근처에 뿌리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창고 하나를 나중에 싹 정리해서 납골당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중국 같은 곳에서는 집에 사당이나 납골당을 두던데, 안될게 뭐가 있나 싶다. 우리 문화에서는 터부시 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차피 묘든 납골당이든 수목장이든, 후세들의 기억을 위한 것뿐 아닌가. '족보'라는 것 또한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후손들이 이 집에서 계속 살아줬으면, 기억해 줬으면 한다. 그러다 내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 그냥 정리해도 난 모르니까 괜찮다.
여기까지가 얼마 전까지 내가 집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번 글처럼 사람도 변하고, 집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다. 무언가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뒤집어 보면, 그 관계가 주는 매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드물게 나와 가족을 위한 땅과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지만, 들고 다닐 수 없는 거대한 집에 매여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은퇴기'에도 썼지만, 은퇴를 앞두다 보니, 어떤 것에도 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커진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에, 반려동물을 들이기도 쉽지 않고 자원봉사활동이라도 정기적인 것은 좀 꺼려지는 판에, 이렇게 덩치도 큰 집을 '소유'하고 있으니 동시에 부담이 된다. 세 달은 해외에 살고 한 달은 들어와 있으면 어떨까 하는 계획도, 제주도에 한 1년쯤 연세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건사해야 할 집이 은근한 부담으로 걸린다.
적절한 수익을 얻고 현금흐름이 가능해질 수 있는 ETF투자나, 주택연금제도에 대해서 이제야 눈을 뜨다 보니, 차라리 집을 짓지 않고 투자를 하거나 작은 아파트 정도로 주택연금을 받아도 괜찮았겠다 싶은 후회가 들 때가 있다. 지난 주말에도 3년 정도 미뤄뒀던 오일 스테인을 바르는 일을 했지만, 덩치 큰 '소소유'와 함께 하다 보니, 끊임없이 신경 쓰고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 엄청난 누수가 3번이나 있었는데, 그때는 마음이 정말 힘들었다. 팔까 싶은 마음도 가끔 불쑥 올라온다. 지나가는 말로 큰 딸에게 "집을 팔면 어떨까?"라고 물었더니, 대답한다. "슬플 것 같아." 그래, 그렇겠지?
어떤 일들이 생기고 혹시 상황과 생각이 변할 때까지, 이렇게 나의 집 이야기를 마친다, 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