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출간-02] 소시민 k로 살기

이웃 : 모태솔로의 성탄절 이브, 병원에서 보내기

by 딸삼빠

각종 연금, 보험, 10억 만들기와 재테크. 모두 '미래'에 대한 고민과 염려를 자극하고 거기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정신없이 달리게 된다. 혹은 내일 '경제적 독립'을 위해서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돈의 노예로 살라 한다. 정말 그래야 하나. 오늘을 치열하게 살더라도, 옆에 있는 온기 있는 한 사람을 살펴보고 한 이웃으로 돌아보며 살 수는 없는 걸까. 나의 내일을 위해 쟁여두지 않고 오늘 내 것을 나누면, 내일의 어떤 이웃이 나에게 기꺼이 나누려 하지 않을까? 나는 이것이 '믿음'이고, 새로운 '보험'이라고 믿는다.


고2에서 고3으로 올라가는 겨울, 헌혈차가 처음 학교로 왔다. 그렇게 처음 시작 피 나누기는 지금까지 100번 정도 했던 것 같다. 대한적십자사와 헌혈의 집, 병원에서 헌혈 자원봉사까지 계수가 정확하지 않다. 헌혈증도 때마다 기부해서 몇 장 없다.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들 한다. 헌혈은 생명을 나누는 특별한 경험이다. 또 피는 나눠 줘도 얼마 지나면 다시 몸에서 더 깨끗한 피로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신장처럼 주면 하나밖에 남지 않거나, 심장처럼 주면 나도 죽는 쫄리는 일도 아니다. 얼마나 쉬운가. 먹을 것도 주고, 선물도 준다. 대학 때 입이 심심하고 날이 더우면 친구와 함께 에어컨 빵빵한 헌혈차로 들어가 쉬면서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먹고 나오곤 했다.


학부생이던 어느 날, 학생식당에 종이가 한 장 붙었다. “AB형 혈액 급구” 이런 걸 보면 잘 지나치지 못한다. 그렇게 처음 여의도 성모병원에 방문했고, 새빛누리회(현 혈액암협회) 헌혈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20,30분이면 되는 전혈 헌혈에 비해 1,2시간씩 걸리고, 당시에는 성분 헌혈이 가능한 헌혈차가 드물어 헌혈의 집이나 종합병원에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 당장 혈소판이 필요한 환자에게 긴급하게 수혈하는 일은, 헌혈 후 내 피가 누군지 모를 어디론가 가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직관적이어서 더 보람이 있었다.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1997년 12월이었던가, 조금 곤란한 부탁을 받게 되었다. 혈액암 환자인데,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서 좋아질 때까지 백혈구 성분 헌혈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헌혈을 해도 되긴 하지만, 여러 사람의 다양한 백혈구를 수혈하는 것이 극도로 쇠약해진 환자에게 좋지 않다고 했다. 가능하면 한 사람이 매일 백혈구 헌혈을 해 주었으면 했다.


매일 백혈구 성분 헌혈을 하고 나서, 가기 전에 백혈구 생성 촉진주사를 맞고, 다음날 와서 헌혈을 하기를 반복했다. 백혈구 생성 촉진주사를 맞으면, 감기몸살 증상처럼 열이 나고 뻐근할 수 있다고 했다. 뭐, 약간 모르모트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좋은 일인데 해야지 싶었다.


환자분은 계명대에 다니던 황OO이라는 누나였다. 환자가 어떤 분인지 알면, 더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성경에는 '피에는 생명이 있다'라고 한다. 내 피의 생명이 그 누나에게 전해지길 기도했다. 매일 저녁에 성모병원으로 가서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헌혈을 했다. 다행히 4,5일 만에 황OO 누님은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상태가 호전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모태 솔로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까지 헌혈을 했어도 별로 억울하진 않았겠지만. 헌혈실 간호사님들은 황OO 씨는 박경규 씨 덕에 살았다고 과분한 칭찬을 해 주셨다. 기분이 참 좋았다. 이후, 말라리아 때문에 헌혈이 금지된 캄보디아에 1년간 지내게 되고, 또 기억하기로는 제도가 바뀌면서 혈액암협회 자원봉사는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요즘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만 전혈 헌혈을 하고 있다.


재발이 잦은 혈액암이지만, 다행히 그 다음 해 여름에도 황OO 누님은 건강하셨다. 벌써 거의 30년이 가까워 간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아, 내가 옛날에 그랬던 적이 있었지'하며 웃으시는 건강한 할머니가 되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