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의 시작.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혹 다른 사람들은 애틋하고 포근포근한 감성이 막 살아날지도 모르겠다. 그 날의 공기, 온도, 설렘들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나이가 꽉 찬 노처녀였고 이승기의 “나랑 결혼해 줄래”를 아침 모닝콜로 들으며 깼던 하루하루였다. 작정하고 결혼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한 해였다. 남편을 만났던 그 해만 3명의 남자와 맞선을 봤다. 소개팅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선 본 남자들 중 남편은 가장 측은했다. 양복을 입고 온 다른 사람들과 달리 후줄근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와서는 “죄송합니다. 제가 전 날 야근을 했는데 약속을 깰 수가 없어서..” 그도 그럴 것이 교회에서 나이 드신 권사님의 중매로 나왔기 때문에 나도 세 번 이상 만나보라는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려고 나왔다는 점에 ‘책임감’점수를 후하게 주고 내가 자주 가던 식당으로 안내했다. 생각해보니 첫 날은 내가 가자고 한 식당, 커피숍을 다 갔구나!! 미쳤네!! 왜 그랬지?!........................;;;;
남편의 그 말을 못 잊겠더라. “혹시, ‘머피의 법칙’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제가 되는 게 잘 없어요. 첫 날 이런 말하면 안 되는데, **씨에게는 진짜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어서..” 불쌍함의 끝판왕 이었다. 연애 심리학적으로도 남자들의 이런 동정심 유발 멘트가 여자들에게 종종 먹히는데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나는 썩은 줄이던, 가죽으로 된 줄이던 그냥 남편을 덥썩 잡게 된 결정적인 멘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이 성격 급하고, 매사 물불 안 가리고, 다혈질인 ADHD 남편을 대변하는 결정적 단어였다.
물론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징조가 보였다. 지금의 시아버지 차를 데이트할 때 종종 끌고 나왔는데, 에버랜드를 다녀오던 날인가. 속도를 100km, 110km, 120km 막 올리면서 내부 순환로를 달리길래 나는 괜찮다고, 엄마가 오늘 **씨 만난 거 알고 계시니까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순간, 남편이 “아씨, 다른 길로 가면 더 빠른데, 왜 이 길로 빠졌지?” 그 때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남편이 미안하다고, 뭐라고 말했냐고 되물었다. 몇 번의 데이트를 더 해보고 나는 헤어질 결심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