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이나 16살이나 엄마가 되기는 쉽지 않다.
16살 소녀는 아이를 낳고 살이 많이 쪘다. 나와 함께 미술치료를 한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이년 전에 조울증 진단을 받았었던 소녀는 우리 기관에 왔을 때 임신 막달이었다. 오자마자 몇 주 후에 아이를 낳았고 지금까지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일 년 가까이 살아왔다. 이곳에 오는 소녀들은 자신의 문제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하나 이상 이거나 임신을 한 청소년들만을 위한 보호기관이기 때문에 이곳엔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빽빽 울어대는 신생아부터 엄마의 손지검을 피해 소리 지르며 달아다는 4살까지의 아이들, 그리고 아직 엄마라는 이름이 버거워 보이는, 또한 자신들의 자녀들 못지않게 소리를 질러대는 또 다른 소녀들이 살고 있다. 잠깐의 설명만으로도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데이케어 시설과 residential aid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 곳 안에서 나름의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출산을 한 순간부터 간호사와 산후관리를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붙어서 신생아를 돌보는 과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먼저 출산을 했고 엄마가 된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떠올리며 적절한 조언을 주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간섭(?) 하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보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이후 엄마로서의 과정을 차분하게 밟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모두가 엄마이거나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16살 소녀가 딱 그랬다. 누가 봐도 딱 사춘기 소녀인 그 아이는 유난히 하얀 피부에 앳된 아이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예민한 성격에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내는 데다가 한번 화가 나면 금세 그 앳된 얼굴과 몸에서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이 나온다. 우울함이 찾아올 땐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 불안감과 초조함 때문에 심하게 다리를 떨거나 심지어 대화가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도 있다. 출산 이후에 치료팀이 약물치료를 심각하게 권했으나 소녀의 아버지는 절대 약은 먹지 않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셔서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약물치료도 거부하고 어떤 치료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소녀가 1년 동안 유일하게 꾸준히 참석한 것이 미술치료다. 처음 만났을 때 단번에 소녀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내가 개인 세션을 제안했을 때 소녀는 나를 무시했다. 그러던 와중에 소녀의 공격성이 너무 심해져서 감금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와 거의 반 강제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몇 개월이 지났다. 소녀가 그동안 완성한 패인팅은 수십 개다. 주로 자신의 얼굴, 남자 친구(아이의 아빠), 그리고 아이의 초상화를 그렸다. 워낙 소질이 있었기도 했지만 소녀의 아이가 데이케어에 가고 나면 학교도 가지 않고 친구도 없는 소녀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가 그림이었다. 자기 아이가 아파서 데이케어에 가지 못할 때도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소녀의 패인팅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몇몇 기관에 있는 다른 클라이언트들은 소녀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소녀는 이제 방에서 나와 그룹에 참여한다. 여전히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지만 다른 아이들과 대화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지난주에 소녀는 자신이 임신을 하며 쪘던 살이 빠지지 않아 고민이라고 지나가는 듯이 얘기했다. 사실 어릴 때 임신 출산을 하는 이들은 따로 산후조리가 필요 없을 만큼 빨리 회복되고 예전 몸으로 돌아오는 속도도 빠르다. 그런데 소녀는 유난히 살이 빠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울증을 겪을 때마다 폭식을 해서 식단 조절을 시켜야 할 만큼 그 문제가 심각했던 상황이었다. 소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서 소녀가 유난히 신경 쓰는 부분은 자신의 얼굴과 몸이다. 조금이라도 살이 쪄 보이면 반듯한 지우개가 몽뚝해 지도록 지우고 또 지우고 고치고 또 고쳤다. 소녀가 밑그림을 고치는 과정은 단순히 자신의 불어버린 몸매에 대한 창피함이나 불만이 아니었다. 소녀가 임신과 출산을 통해 느끼는 상실감은 꾀나 컸다. 이곳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소녀가 연애를 하며, 원치 않았지만 임신을 경험하며, 부모가 반대했지만 출산을 결심하며, 그리고 부모의 경멸의 눈초리를 끊임없이 받으며, 남자 친구와의 만남을 제한당하며... 그리고 이 기관에서마저 문제아, 골칫거리 등으로 찍히며 지켜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얀 피부에 유난히 맑은 푸른 눈을 가진 소녀는 누가 봐도 이쁘고 싱그럽다. 평범하고 행복했던 소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리고 어떤 계기를 통해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임신을 하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자신은 더 이상 Daddy's girl이 아니고 학교에서 popular girl이 아니고,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소녀가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살이 쪄서 뚱뚱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싫다고 했다. 자신을 짓누르는 상실감 속에서 소녀는 상실감의 정체를 알지 못한 체 그 헛헛함을 먹는 것으로 채워왔다. 그런데 살이 찐 자신의 모습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소녀가 처음으로 자신이 "뚱뚱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excercise를 해야겠다고 처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좀 더 빨리 시작할걸 하며 아쉬워하는 소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 참으로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왔잖아. 아이를 품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생명을 출산하고 그 아이가 1살이 되도록 네가 열심히 돌봤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말을 하고 화를 조절하지 못해도 니 아이만큼은 네가 참 잘 지켜냈다. 그렇지? 너는 고작 16살이야. 나는 36살인데 아이 하나 키우면서 너무 힘들었어. 16살에 아이를 이만큼 건강하게 키우고 (네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지켜온 너 참 장하다. 운동 열심히 해서 살도 빼자! 넌 충분히 예전만큼 이뻐질 수 있어. 그런데.. 지금도 넌 참 이뻐!"
얘기를 하면서 속으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사실은 나도 듣고 싶은 말이었다. 36살이나 16살이나 엄마라는 위치는 힘들다. 나를 많이 잃기도 하고 또 포기하기도 한다. 물론 서툴고 부족한 부분도 너무 많았지. 잃어버린 자유와 싱그러움을 그리워하며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내 그러는 나를 자책하기도 하지. 그렇지만.. 지원아, 잘 지켜냈다. 사랑을 지켜낸 너는 지금도 참 이쁘다...라고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