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기다려주는 것에 대한 고찰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다. 그래서 일처리도 시원시원하고 데드라인도 잘 맞춘다. 완벽주의적 성향은 있었다가 많이 없어졌는데 어쨌든 급한 성격과 완벽주의적 성향은 잘 버무리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고 대부분은 서로를 무지하게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성향은 애를 키우는 데 있어서는 독이다. 육아의 대부분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 기다림을 나는 잘 해내지 못한다. 기다리지 못하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내가 예민할 때는 자주 있고 그나마 내가 정성스럽게 육아를 하리라 마음을 다스릴 때는 쉽게 참을 수 있다. 그러니 일관성은 이미 안드로메다에 가 있다. 어떻게 나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까? 아이가 실수를 하거나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생떼를 부리거나 규칙을 어길 때, 어떻게 아이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시키고 아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공부와 노력밖에 없다. 선천적으로 느긋한 성향을 타고난 어머니들은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지만 나처럼 성격이 급하고 게다가 완벽주의 성향까지 있다면.. 더 많이 공부하고 수련해야 한다.
그래도 자꾸 중간에 정신줄을 놓고 아이를 다그치는 나를 발견할 때면 괴롭다. 나는 왜 안되지? 온갖 좌절감과 자책감이 나를 공격한다. 분명 내담자를 대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가능한 일, 혹은 정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기다려주는 일이다.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내가 유독 내 아이를 받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을 실패할 때가 있다면, 그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나를 비집고 들어올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 일이다. 부모가 되는 길에 공부와 노력이 중요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법부터 점검하는 것이다.
내가 실패한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내가 아이의 잘못과 실수를 공격하는 것과 똑같다. 내가 잘 기다리고 이해하다가도 아이에게 내는 화는 사실 내가 나 자신에게 느끼는 수치심에 대한 방어인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 내 아이에게 어려운 것은 내가 내 아이를 나와는 다른 독립된 인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소유물처럼 혹은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지 수없이 보아온 나로서는 내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때 나에게 화가 많이 난다. 그런데 함정이 여기에 있다. 내가 나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보듬아주고 기다려줘야 한다. 인격의 성숙을 이뤄보자라고 결심한 이십대로부터 십 년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많이 부족한 나를 본다. 이 대표는 이제 고작 십 년의 반을 살았다. 나의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변화가 지연될 때 혹은 정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나는 그런 나를 격려하고 기다려줘야 한다. 내가 나에게 관대할 때 내 아이에게 관대할 수 있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 대 표가 학교 가는 길에 많이 울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 그런 그의 마음과 위로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온 이 대표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문득 유치원에 처음 갔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처음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 낯선 환경이 너무 힘들어서였는지 몇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왜 나는 이대표처럼 학교 가기 싫다고 징징대거나 울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 상황을 이겨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고 나에게 말을 빼앗아 갔던 것 같다. 다행히 이 대표는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학교 가기 싫은 마음을 말로 눈물로 온갖 드라마틱한 표정과 행동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 부분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되었고 그렇게 잘 전달된 그의 감정을 보며 나는 다섯 살의 나에게 살짝 위로의 말을 전했다. "괜찮아 지원아, 실수해도 돼. 너무 빨리 잘 적응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너는 고작 다섯 살이야. 무언가를 잘 해내는 나이가 아니라 많이 실수해야 하는 나이.. 아니, 실수다 아니다는 평가가 아직 이른 나이. 그래서 그냥 니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아야 하는 나이..." 이 말을 나의 다섯 살에 전해 본다. 그리고 같은 말로 이대표를 위로했다.
이대표는 내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림을 전공한 엄마 밑에 이렇게 그림에 소질이 안 보이는 애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우리 아이는 그림에 관심이 없다. 정정한다.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났음으로... 우리 아이는 그림에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표현 방법으로 예술을 하는 아인가보다. 아무튼 그런 그가 내 그림을 십 분이 넘게 바라보았다. 자기 전에 내 일기장을 자기 침대로 가져가서 한참 보다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또 그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음이 뭉클했다. 내 진심이 전해졌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기다린다는 것은 억지로 화를 누르며 이해 안 되지만 참아주는 것과는 다르다. 기다리는 것은 이해하고 수용해주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아이에 대한 이해와 기다림은 내가 먼저 나를 수용하고 보듬어주고 기다려 줄 때 가능한 것임을 느낀다. 그래서 육아에 수많은 방법론과 전략들이 있지만 먼저는 엄마가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하는 것임을 오늘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이대표는 나의 다이어리에 낙서를 자주 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낙서에 무언가를 이어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엄청나게 소박한 예술성에 가끔 영감을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그림을 완성했다. 나도 모르게 이어 그린 그림은 번데기였다. 마치 생명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 번데기... 그 안에서 애벌레는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며 날개를 창조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번데기 같은 우리 이대표도 한때 꼬물꼬물 귀여운 애벌레였고 그리고 언제가는 나비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은 그저 귀여울 때가 더 많은 이대표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도 아직 번데기다. 언젠가는 나비가 될...
움직이지 않는다고 자라고 있지 않는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