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출근이 싫어도 벌써 죽고 싶진 않아
연말이 다가오자 부서 송년회 날짜가 잡혔다. 보통 우리 부서는 고기를 먹는데, 이번에는 회식 메뉴 담당해 주시는 분께서 야심차게 해산물을, 그중에서도 복지리를 선택하셨다. 복지리를 먹기로 한 당일 점심 전까지 사실 나는 복지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회식 장소로 가는 길에 어떤 선배님이 맑은 복어탕을 '복지리'라고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회식 장소에서 자리에 착석하는데, 꼭 4명씩 같이 앉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1인 1개 뚝배기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넷이서 하나의 탕을 같이 먹는 방식이었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여러 대화를 들어보니, 나와 내 동기들 말고도 복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분들이 꽤 많이 계셨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복어에 독이 있지 않냐며 이런 저런 얘기가 시작됐다.
한 3년 전에 복어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요리를 먹고 한 사람이 사망했고, 알고 보니 요리사가 자격증이 없었다는 기사가 있었지 않았냐며 갑자기 공포감이 조성되었다. 어떤 부장님은 은수저로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셨고, 복어 독이 청산가리보다 강하니까 팔팔 끓이면 오히려 농도만 짙어지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하며 깔깔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복지리가 테이블마다 세팅이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반찬으로 나온 복어 껍질이 들어간 미나리 무침도 일부러 안 먹었는데 말이다. 같은 테이블의 용감하신 한 분께서 기미상궁을 자처하며 먼저 숟가락을 드셨다. 어떤 복어에 독이 완벽히 손질되지 않았을지 모르니까, 기미상궁은 각 테이블에서 필요했다. 우리 테이블의 기미상궁께서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 나도 한 입 먹어보았다.
으으.. 뭔가 엄청 시원한 맛이었다. 미나리를 많이 넣어서인지, 복어의 향인지 모르겠지만 민트를 머금은 맛이어서 양치를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복어살도 조금 먹어봤는데 나름 고소했다. 뼈를 발라 드시던 분께서 '혹시 뼈에 찔리면 위험한가?' 하시길래 차마 무섭다고는 못하고 킥 웃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복어를 즐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하필 나는 복어가 헤엄치고 있는 수족관을 제대로 봐버렸다. 아쿠아리움에서 본 오동통하고 귀여운 복어와 달리 훨씬 징그러운 무늬를 갖고 있었다. 으으..
오후에 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는 내내 복지리 때문에 집중이 안되었다. 급기야 몰래 복어 독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보통 암컷 복어의 난소에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이 있고, 산란기에 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이 산란기라는 것도.. 그래도 복어 독이 내장 부위에 있으니 제대로 손질되었다면 다행히 뼈를 발라드신 분은 무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참고로 복어독은 치료제가 없으며, 50%는 사망한다고 한다.
메스꺼운 마음에 일찍 퇴근을 했다. 저녁으로는 아무리 먹어도 죽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 밀가루와 닭고기로 만든 닭강정을 먹었다. 여전히 복지리 국물의 시원한 맛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너무 허기가 져서 오렌지에 치즈케이크까지 먹었다. 잠에 들기 직전까지 복어가 생각났고, 좋은 경험이었지만 내가 찾아먹진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어렵게 잠들었다.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니 독이 없는 양식 복어였거나 요리사가 손질을 잘하신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