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와 어두운 밤길을 걷던 중에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고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 장면 속의 구체적인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졌지만, 그 때 바라봤던 달의 모습과 내가 느꼈던 아픔에 대해서만큼은 꽤 생생하게 남아있다.
인간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다. 살면서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하는 유명인들을 열렬하게 응원하거나, 먼 과거의 유적지를 보면서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일은 시공간적으로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마음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일까. 혹시 ‘닿을 수 없음’ 그 자체가 사랑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다. ‘나와 닮아서’이거나, ‘나와 달라서’이거나. 어떤 이들은 자신과 닮은 점 때문에 상대에게 끌리고, 어떤 이들은 자신과 다른 점에 마음을 준다. 어쩌면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마음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과정 자체가 ‘닮음’과 ‘다름’ 사이에서 출렁이는 것일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은 동질성과 타자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를 붙잡는 것은 동질성보다는 타자성이다.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이 느끼는 바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공감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이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일일 텐데,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나’와 ‘너’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은 수학책의 공식만큼이나 딱딱하고 차가운 사실이다.
‘나’는 ‘너’에게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타자성을 극복하려 한다.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상을 하고,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닮아가려 하고,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닿으려 한다.
닐 암스트롱이 결국 달을 밟은 것처럼 말이다.
‘닮았다’라는 말은 결코 ‘같다’가 될 수 없다. 어쩌면 닮았다는 말의 시작점은 ‘같다’가 아닌 ‘다르다’일 수도 있겠다.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이 서로를 이끌리게 만드는 이 자성(磁性)과도 같은 성질을, 인간은 가지고 있다. 다름을 사랑의 근거로 두는 인간을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