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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기영 Aug 16. 2017

나를 알아 가는 일

노랫말을 쓰다

    제목: 은희

    엄마에게 약속했지
    널 훌륭히 키우겠다고
    애지중지 키웠지
    예쁜 우리 딸

    어느새 결혼할 나이
    데리고 온 남자 친구
    그 녀석은 안돼 절대 안돼
    푸른 수염이 났거든
    
    엄마에게 약속했는데
    널 지켜줘야 하는데
    사라져 가는 내 기억들
    흐려져 가는 내 추억들
    
    잡으려고 잡으려고
    뒤 돌아보니
    넌 처음 만난 그대로
    다섯 살 그때 그대로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쓴 노랫말이다. 책의 내용을 모르면 좀 어리둥절 할 수도 있겠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가 막힌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읽고 나서 노랫말을 쓰자니 어떤 부분을 발췌해서 어떻게 얘기를 풀어야 할지 무척 고민이 되었다. 결국 소설에서 처럼 주인공의 시각으로 자신의 딸 은희를 걱정하는 내용으로 노랫말을 썼다.


노랫말을 쓰는 연습을 한건 <노래하기 위해 살고 있는 글자들>이라는 작곡 강좌에서였다. 우연히 발견한 강좌였는데, 스스로 곡을 만들어 본다니 매우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무려 홍대 여신 요조가 강사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수강신청을 했다. 작곡 수업이므로 음악 하는 수강생으로 가려서 받을 것이고 나는 수강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메일이 왔다. 입금하고 모일 모시에 홍대로 오면 된다고.


자기소개와 함께 내 안의 욕망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수업은 시작되었다. 나의 생각, 고민, 욕망 등에 대한 솔직한 탐구와 고백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것, 그리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일기를 꾸준하게 쓰는 것이 작사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작곡 방식이 다른데, 요조는 가사를 먼저 써 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을 붙이는 방식으로 노래를 만든다고도 했다. 노랫말의 대부분은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데 책, 영화, 친구와의 대화, 심지어 매일매일 수집한 가게 영수증도 그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지루하고 사소한 일상에서 나오는 특별함이 그가 만든 노래의 매력이라 하겠다. 나는 그런 그의 노래를 좋아한다.


곡을 쓰는 것 자체는 사실 이 수업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자기만의 언어로 노랫말을 쓰는 것이 중요했다. 노랫말을 먼저 써 놓고 그에 어울릴 만한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음을 붙여 곡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노래실력과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요한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한 명씩 선정해서 요조가 음을 만드는 작업을 같이 해 주었다. 한 번은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거기서 느낀 것을 소재로 각자 가사를 써오라고 했다. 나는 운 좋게 제비뽑기에 당첨이 되어 음을 붙이는 작업을 함께 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쓴 노랫말에서 '푸른 수염이 났거든' 부분이 특히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 부분을 후렴구처럼 반복해서 쓰고 가사도 좀 줄여서 앞의 두 단락만으로 짧은 노래를 완성했다.


곡을 완성한 후에는 노래를 녹음해서 전체 수강생한테 공유해 줬는데, 나보고 목소리가 좋으니 직접 불러서 녹음을 해보라고 했다.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즉석에서 만들어진 곡을 따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좋아하는 가수 앞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낯설고도 민망한 경험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자꾸 음을 틀리니까 중간에 요조가 리드를 해 주었다. 그래서 그 날의 녹음 파일에는 내 목소리와 함께 홍대 여신의 목소리도 작게나마 같이 들어 있다. 그 떨렸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곡 수업을 받은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수업이 있는 날은 퇴근하고 수도권을 누비고 다녔다. 회사는 강남에 있었고 강의실은 홍대에, 그리고 집은 경기도 용인이었다.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시간도 많이 써야 했고 힘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재미있었다. 수강을 하는 기간 내내 머릿속에 온통 노랫말 생각밖에 없었다.

    

그때 이후로 노래 아니 노랫말을 더 이상 쓰지는 않았다. 대신 이것저것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짓는 과정을 기록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 땅을 사고 그 위에 우리가 원하는 모양으로 단독주택을 지어서 이사를 왔는데, 어쩌면 평생에 한 번밖에 없을 경험일듯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작년에는 독일과 네덜란드로 가족여행을 갔다 왔다. 자동차를 렌트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그 행복했던 기억들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패키지여행을 했거나 대중교통으로 다녔다면 마주하지 못했을 뜻밖의 경험들 말이다. 매일 하루도 빼지 않고 한두 잔씩 마실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니 커피와 관련된 글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쓰고 싶은 주제가 생길 때마다 글을 썼고 그에 따라 매거진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취미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재미있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시간이 잘 나지를 않는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틈틈이 할 수밖에 없는 데 이것이 만만치가 않다. 주제를 떠올리는 것도 그리고 그 주제를 이용해 글을 쓰는 것도 때론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한참을 쓰다가 도대체 내가 뭘 쓰고 있는 거지? 하고 그냥 통째로 삭제해 버릴 때도 있다. 다 쓴 글을 발행할 때는 또 어떤가. 누가 보고 욕하지는 않을까, 이렇게 형편없는 글을 내 보내도 될까, 아무도 안 읽으면 어쩌지 등등 고민이 끝이 없다.


그래도 계속 노력 중이다. 무언가를 보거나 읽거나 행하고 나서, 혹은 갑자기 생각난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보잘것없는 글들을 하나하나 써 가고 있다. 노랫말을 쓰는 것은 내면의 탐구와 고백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모든 글 쓰는 행위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도 나를 알아가고 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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