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기영 Nov 04. 2017

노란 병아리 얄리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병아리 두 마리가 있었다. 병아리라 하기에는 조금 크고 닭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은 중병아리였다. 마당 한편에 작은 집을 만들어 놓고 키웠다. 학교 갔다가 오면 모이를 주었고 가끔 개미를 잡아다 먹였다. 삐약거리며 먹이를 쪼아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한참을 쳐다보며 놀곤 했다.


 

집 대문 앞은 단단한 흙으로 된 땅이어서 나뭇가지로 그림 그리기가 좋았다. 그날도 쪼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데 뭔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목줄이 풀린 커다란 개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집 안으로 도망쳤다. 마침 안에 계시던 어머니께 개가 쫓아왔다고 얘기하다가 대문을 닫지 않고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밖에 개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마당으로 나갔다. 병아리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병아리를 찾으러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뛰어다녔다. 골목을 돌아서니 저 멀리 논두렁에 어른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한걸음에 달려갔다. 벼를 모두 베어내 황량해진 논 앞에 커다란 개가 붉은 혀를 길게 내밀고 헐떡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붉은 피를 뒤집어쓴 병아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을 울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홀로 남은 병아리를 오토바이에 싣고 어디론가 다녀오셨다. 그날 저녁에 닭백숙이 식탁에 올라왔다. 혹시 우리가 키우던 병아리를 잡아 온 거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아니라고 하셨다. 그 병아리를 가져다주고 다른 닭으로 바꾸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믿기 힘들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또 한참을 울었다.


그 뒤로 한동안 닭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대문을 닫지 않고 도망가서 병아리가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홀로 남게 된 병아리는 닭백숙이 되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건 그즈음이었다. 어느 날은 외할머니 앞에서 펑펑 울기도 했다. 나 죽으면 어떡하냐고 외할머니랑 가족들 못 보게 되는 거 너무 무섭다고. 어린 손자가 죽음이 무섭다고 울었으니 외할머니는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그로부터 십여 년 뒤에 신해철이 <날아라 병아리>를 발표했다.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어린 시절 키우던 병아리 생각이 나면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 보니 가사도 다 외웠다. 워낙에 히트곡이 많은 신해철이지만 이 노래만큼 내가 좋아한 노래는 없었을 것이다.


삼 년 전 이맘때 신해철은 너무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동시대를 살아온 예술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기에 마치 내가 알던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 신해철을 생각하면 늘 <날아라 병아리>가 생각나고, 내가 키우던 두 병아리가 떠오른다. 병아리를 돌보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죽음에 대한 슬픔을 처음 겪었던 그 아픔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 앞에서 철없이 울던 내 모습도 생각난다. 그 사이 나이를 이렇게 먹었음에도 여전히 죽음은 두렵고 슬프다. 내가 알던 사람이 죽는 것도, 내가 죽는 것도.


오늘 유난히 <날아라 병아리> 노랫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눈물이 마를 무렵
희미하게 알 수 있었지
나 역시 세상에 머무르는 것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할 말을
알 순 없었지만
어린 나에게
죽음을 가르쳐 주었네

굿바이 얄리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All images from Celine Hwang | 둘 모두 우리 딸이 그렸다. 첫 번째 그림은 아빠의 두 병아리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렸는데 왠지 모르게 표정이 슬프다. 아이는 아직 죽음에 대해 무서워하지 않는다. 아빠가 죽어서 두더지로 다시 태어나면 땅속에다가 예쁜 집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단지를 받지 않을 자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