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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거실에서 일합니다

by 스토너

오래간만에 대학동창과 통화를 했다. 함께 재료공학을 전공했지만, 그 친구는 전공을 살려 제조업에서 일하고 있고, 나는 전혀 다른 분야인 IT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나저나 넌 아직도 재택근무 하냐?"

"응,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회사 나가"

"쯧쯧... 그래가지고 일은 언제 하냐?"


회사에 출근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일하는 친구 입장에선, 재택근무를 하면 그냥 집에서 노는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코로나 이후 많은 이들에게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었다. 나 역시 몇 년 전 이직한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집에서 일하면 집중이 흐트러질 때도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바닥에 옷이 떨어져 있으면 걸어놓고 오거나, 집이 지저분해 보이면 갑자기 로봇청소기를 돌리기도 한다. 그런 사소한 딴짓들이 종종 생긴다.


대신 회사에서는 누가 지나가다가 커피 한잔 하자고 부르거나, 옆자리 사람의 통화 소리에 귀가 쏠릴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는 집이 오히려 더 조용하고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 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출퇴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하루 왕복 네 시간가량을 아낄 수 있다. 그만큼의 에너지를 온전히 업무에 쏟을 수 있고, 업무를 마치고 나면 바로 개인적인 일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다.


내가 일하는 공간은 일층 거실의 한쪽 구석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오가면서 내 대화를 들을 수 있다. 최근 팀원 채용이 있어 인터뷰를 자주 했다. 인터뷰에서 내가 반드시 하는 질문 중 하나는 '가장 크게 실패했던 경험'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해, 후보자가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는지,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날, 인터뷰를 한참 하고 있는 중에 사춘기 딸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딸은 익숙한 동선으로 오가며 자기만의 루틴을 수행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딸에게 잘 다녀왔냐고 인사를 건넸다. 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아빠, 왜 그렇게 무서운 질문을 해?"

"응? 무슨 질문?"

"실패한 경험 얘기하라고 하잖아. 무섭게..."

"그게 왜 무서워?"

"무섭지. 실패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 수도 있는데.. 왜 그런 걸 물어봐?"


아직 큰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실패'라는 단어가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나 보다. 그건 무섭게 하려는 게 아니라, 아빠와 함께 일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얘기해 줬다. 아이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빠는 어떤 실패를 했어?"

"예전에 영업을 한 적이 있었어. 아빠는 그 일을 잘할 줄 알았는데, 쉽지 않더라. 결국 일 년 만에 다른 일로 바꿨어. 새로운 도전에 실패했지. 힘들었지만 그 경험 덕분에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게 되었어. 특히 영업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됐고, 그 뒤로 다시 영업은 안 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응 그랬구나."


"그런데 딱 한 가지 경우에는 다시 할 수도 있어."

"어떤 경우?"

"응, 아빠가 만일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그나마 아빠를 받아주는 곳의 업무가 영업뿐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할 거야."

"왜? 실패했다며? 그럼 그 일이 싫을 거잖아?"

"싫고 두렵지. 그렇지만 아빠는 너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잖아. 영업이든 뭐든, 너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이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다 할 거야"


"감동이야..."


아이의 말에 나도 눈물이 날 뻔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그저 평소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늘 대문자 T의 모습을 보이던 아이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감동이라고 했다. 아이는 그렇게 삶의 무게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고,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아빠로, 동료로, 나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냈다.




*cover image by Ken Tomita | pex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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