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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이 보여준 경쟁의 서사

by 허진혁

<무한도전>은 내게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단연코 첫 손에 뽑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어릴 적엔 친구들과 같이 놀다가도 매주 토요일 밤 6시 반만 되면 무한도전을 보러 집에 들어오곤 했을 만큼 무한도전에 열광했다. 정말 무한도전은 나의 10대 시절을 함께한 소중한 존재이다.


요즘 tv도 자주 안보고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없어 계속 유튜브에서 무한도전 클립을 찾아보곤 한다. 같은 회차를 몇 번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고 자꾸 볼수록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10대 때는 유재석이 정말 반듯하고 정중한 사람이고, 정준하는 밉상에다가 잘 삐지는 비호감, 길은 뻔뻔하고 눈치 없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유재석에선 눈치 보일만큼 까다롭고 차가운 면이 보이고 정준하는 따뜻하고 정 많은 착한 형으로, 길은 배려심 깊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다른 멤버들에게서도 내가 어릴 때는 보지 못했던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통해 볼 수 있는 새로운 면들이 자꾸 보였다. 하나의 텍스트에서 다양한 함의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내가 무한도전을 사랑하고 계속 보는 분명한 하나의 이유이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텍스트가 하나 있었다. 해당 특집을 보면서 참 무한도전 제작진의 기획과 연출, 편집이 심심풀이 예능이 아닌 예술의 영역에 닿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능 버라이어티라는 형식은 다큐나 영화와 같은 다른 매체와는 차별화되는 표현 및 전달 방식이 있고 그런 방식으로 특별한 감동과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 복싱특집은 라디오 dj김미화씨의 부탁으로 시작된다. 탈북 출신으로 wba 여자 페더급 세계챔피언의 타이틀을 딴 최현미라는 복서가 있는데, 타이틀을 수성하기 위해 방어전을 치러야 하지만 열악한 국내 복싱 환경상 파이트 머니는커녕 스폰서도 없어 방어전을 치루기 힘든 상태라는 것이다. 무한도전 팀은 이 사연을 듣고 최현미 선수가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게 돕기로 한다. 무한도전 팀은 최현미 선수를 찾아가는데, 그녀는 열약한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자세로 열심히 훈련에 몰입하고 있었다.


무한도전팀의 도움에 힘입어 타이틀 방어전이 성사되게 되었다. 상대는 일본 랭킹 1위 츠바사 선수. 반드시 이겨야 하는 한일전 타이틀까지 걸리면서 승부에 긴장감이 한층 더해진다. 무한도전팀은 상대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일본으로 직접 가 츠바사 선수와 마주한다.


이곳에서 특별한 서사로 이끄는 반전이 일어난다. 든든한 스폰서의 지원 아래 좋은 환경에서 훈련을 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예상과 다르게 츠바사 선수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초라한 복싱장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도 하나 없었다. 거기다 인터뷰를 통해 선수 개인의 가슴 아픈 사연까지 드러난다. 경기에 임하는 다짐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츠바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링 위의 승부는 서로가 가진 집념이 대결하는 것이라고. 이제 상황은 반전된다. 탈북자에다 지원도 부족했지만 노력 끝에 챔피언 벨트를 획득한 한국 소녀의 챔피언 자리를 노리는, 부유한 환경에서 훈련한 냉혹한 일본 챔피언이라는 악역은 사라진다. 무한도전은 악역의 가면을 벗겨버린다. 이제 보이는 것은 일본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최현미다.


한일전은 대게 악이라고 상정되는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서사가 부여되곤 한다. 축구나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의 한일전은 양 측 국가대표의 대결인 동시에 국가 간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무한도전 복싱특집의 서사 속 최현미와 츠바사의 대결에서 는 국적, 언더독과 탑독의 관계가 지워진다.


굳은 의지와 집념의 대결만이 링 위에 남는다. 나는 그 장면을 시청하며 누가 이기기를 응원하지 않았다. 두 선수의 열정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그들의 정신력을 보며 참 부럽기도 하고 삶이란 이렇게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인가 싶어 슬프기도 했다. 두 선수를 응원하는 군중 속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선수를 응원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큰 감동을 자아냈다. 자기 딸이 맞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다. 승부의 서사라면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 그러나 무한도전 방송에서는 승자가 하늘 높이 손을 뻗어 보이는 이 장면이 없다. 무한도전이 보여주는 서사에서는 승패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는 자가 승자라는 어찌 보면 뻔한 메시지를 어떻게 작위적이거나 피상적이지 않게 잘 싸서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까? 위에 언급했듯이 예능 버라이어티라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한도전은 매주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무한도전을 봐온 시청자들은 출연자 개개인의 캐릭터와 서로 얽힌 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웃기며 시청자들은 이들에게 호감을 가진 상태로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카메라가 눈이 되어 제 3자의 시선에서 등장인물의 행동을 바라보는 형식 자체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매체와 같지만 등장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대강 유추할 수 밖에 없는 이들과 달리 무한도전과 같은 예능 버라이어티를 보는 시청자는 출연진의 가족관계나 커리어, 인간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다. 출연자가 처한 환경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할지 예상할 수 있다.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연민하고 슬퍼하고 감동받을 때, 시청자는 제 3자지만 그 감정에 진솔하게 공감할 수 있다. 친구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주듯이 말이다.


탐사와 인터뷰 형식으로 두 선수이 지닌 내면의 이야기를 알아간다는 점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처음에 최현미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탈북 출신의 여자 복싱 선수가 돈이 없어 경기를 못하고 있구나. 참 딱하네”라고만 생각했지만 직접 그 인물과 대면해 개그와 같은 요소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과 사연을 알게 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 호감은 승리했으면 하는 응원으로 이어지게 되고 흥미를 가지고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츠바사 선수 또한 직접 만나서 서사를 부여하기 전까지 그녀는 악역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만남 후에는 긍정적인 인식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결국 호감있고 잘 아는 연예인이 대상과 인터뷰하며 유머와 함께 내밀한 이야기를 끌어내며 서사를 형성하는 이 특이한 예능 버라이어티의 형식과, 단순한 승부의 서사가 아니라 두 명의 선수가 힘든 환경을 딛고서 최선을 다해 승부를 벌인다는 서사가 잘 어울려져 상업과 예술적 측면 모두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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