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포템킨>이 지닌 프로파간다적 속성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정치적 선동에 대해, 충분한 비판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적 완성도만 놓고 본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생각컨대 이 영화가 수 많은 선전영화 중 하나가 아닌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흔하디 흔하고 뻔해 빠진, 프로파간다에만 목적성을 띄고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사실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다른 선전영화에 비해 크게 뛰어나다고 볼 수 없지만, 이 영화를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것은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한 스토리텔링의 미학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에이젠슈타인은 일단 아름답고 웅장하게 찍었다. 다양한 구도에서 찍힌 무수한 쇼트들은 그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다. 인물들의 배치, 미장센, 장엄한 스펙타클까지, 화면을 바라보는 눈이 본다는 것 그 자체로 즐거울 수 있었다. 특히 CG의 개념도 없던 그 시절, 어마어마한 수의 엑스트라는 사회주의 체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영화 산업의 거대한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영상에서 펼쳐지는 웅장한 미장센은 사회주의 체제 선전이라는 영화의 목적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에이젠슈타인은 짧은 길이의 쇼트를 무수하게 병치시켜 빠른 리듬의 흐름을 전개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급박한 행동을 통해 템포를 높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절정을 이루는 장면은 길이가 긴 쇼트를 통해 펼쳐 보이며 그 절정의 순간을 한껏 음미할 수 있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야기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 상태로 결말까지 만족스럽게 이끌려갈 수 있었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의 리듬과 템포를 적절히 조절하여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있는 이야기를 조직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히, 그 유명한 ‘오데사 계단 신’으로 대표되곤 하는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인 몽타주가 그 특별한 리듬과 템포를 형성함과 동시에 강렬한 의미를 가진 이미지를 구성했다고 생각한다. 먼 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찍은 쇼트의 충돌, 공포에 사로잡힌 오데사 인민의 모습의 쇼트와 제정 러시아 군인의 잔혹한 모습의 쇼트의 충돌, 길이가 상이한 쇼트간의 충돌 등등. 정명제와 반명제가 합쳐져 합명제가 되는 변증법의 원리처럼 상이한 쇼트들이 서로 충돌하며 단순한 합 이상의 특정한 의미와 관념을 전달한다.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인민들에 대한 연민, 폭력에 대한 공포, 정치적 탄압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식이 그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인 몽타주는 대중의 의식을 이끄는 강력한 효과를 낳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편집방식에의 순응을 거부하고, 새로운 편집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영화의 표현 방식의 가능성, 나아가 영화가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 또한 확장시켰다.
<전함 포템킨>을 언급하면 항상 따라오는 ‘오데사 계신 씬’이 가장 인상적이만, 나는 제 2막에서 십자가를 든 왜 정신이 반쯤 나가 보이는 주술사가 나오는 장면도 아주 인상 깊었다. 종교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어나는 가운데, 근엄하게 신의 권능을 설파하기는 커녕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주술사의 모습을 통해 “브루주아를 타도 하는 것은 오로지 인민의 투쟁에 의해서이며, 신의 권능이 아니다. 아둔하고 겁 많은 종교쟁이는 저리 꺼져라”. 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그 장면에서 혁명의 주동자 바클린슈크가 지배 계급의 인물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술사가 거치적거리자 내뱉는 “꺼지시오, 주술사”라는 말이 그 의미를 함축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