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은 감정과 생각과 질문이 들게 하는 영화였다. 생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 앞에서 자신에게 큰 가치가 있는 대상이 있지만 파멸 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로 가는 것. 선택의 길목에서 그런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는가? “가치를 따져서 나에게 더욱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다”라고 대답한다면 자신의 삶을 바칠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얼마나 같이 지냈는가? 그 대상과의 만남의 기간과 관계의 깊이가 과연 삶을 바칠 만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삶을 바칠 만큼이라는 정도는 어떻게 재단하는가? 대상을 위해 삶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학습된 것이 아닐까? 사회로부터 문화로부터 신화로부터 학습되어 내재화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심적인 안정과 만족을 위해서 하는 선택이니 그것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 때문이 아닐까? 새롭게 가치 있는 존재를 상정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방어기제가 아닐까? 실험실의 쥐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만족을 주지만 과연 더 멀리서 보았을 때 계몽된 인간의 삶이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는 시간과 같은 거대한 무엇인가에서 탈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다가올 위험에 대한 대처로 심적인 회피처를 만들어 그것을 미화시키고 그 속에 숨어드는데 이런 사람의 심리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종교는 인간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일까? 등등 여러 생각이 들게 했던 영화였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한 남자는 아이였을 때 각인된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 그 이미지는 남자의 이어진 행동의 표지판이 된다.
기억이 떠오를 때는 이미지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미지에는 공간과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영화에 사진들을 이어붙인 형식을 부여한 이유는 어쩌면 기억을 상기시킬 때 사진의 형식으로 떠오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주인공 행동의 원인이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리비도의 대상에게로 향한다는 점, 특히 초반부의 나레이션에서 “일상적인 순간에서는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순간의 상흔들을 보여줄 때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었다.
비윤리적인 실험을 사람에게 하는 현실 상황이 배경이 된다. 주인공은 실험자들에 의해 통제받아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실험자들에게 실험 쥐처럼 이용된다. 실험자들은 어린 시절의 이미지를 그에게 심어 그를 조건화시켰다. 심지어 주인공은 꿈까지 검열당하는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과 의식의 발현이라고 한다. 주인공은 무의식과 의식 모두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다가올 미래는 어쩌면 꿈까지 검열하는 강력한 통제를 하는 권력자들 하의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감독은 생각했을 것 같다.
미래에 그리고 현재에도 일종의 팬옵티콘 안에 갇혀 그들이 정확히 원하는대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우리를 보며 권력자들이 웃지 않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인공들이 만나는 장소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낙서 앞, 박물관, 쨍쨍한 햇살이 비치는 곳, 정원과 삼나무 줄기 등이다.
낙서는 세월이 지나도 그 모습 그 이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그들이 찾은 박물관은 시대를 초월한 동물들로 가득한 곳이다. 과거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가 과거와 현재의 동물들을 본다. 이는 같이 둘이 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탐험하는 모습 같았다. 박물관에는 박제되어 있거나 화석으로 남아 있거나 만들어진 동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영상으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정영상인 존재들이 등장한다는 것, 정영상 속 정영상은 영화 자체의 형식과 그 의미를 훌륭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태양 또한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항상 일정한 이미지의 모습으로 보인다. 공원 속에서 현재의 시간을 기록한 삼나무 줄기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남자는 그 삼나무 줄기 너머를 가리키며 자신이 미래에서 온 존재임을 말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의식적인 어떤 것에서 연결되어 있어 타임머신과 같은 특별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갈 수 있고 미래에서 현재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설정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다른 시계로 가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약물을 사용해 다른 시계를 ‘감지’하고 그곳에 산다는 생각은 상당히 재밌었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인식은 ‘이미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형식은 영화의 내용에 잘 어울리는 그릇이 된 것 같다. 과거에서 보는 이미지는 현재에서 보았던 이미지와 합쳐지기도 한다. 현재와 과거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것이다.
여자가 눈을 깜빡이는 장면만 빼면 영화는 정영상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정영상으로만 진행되었지만 이상하게 동영상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 이미지와 그 바로 다음 이미지는 연속된 동작을 나타냈는데 그 이미지의 텀 사이는 상상으로 움직임을 그려볼 수 있었다. 또한 소곤거리는 말소리는 영화의 분위기와 현실감을 더해줬다. 특별한 음악을 사용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전환하는 효과와 이미지 줌 인, 줌 아웃 효과가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툭툭 끊기는 느낌이 없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때는 동영상 촬영이 가능한 시대였지만 감독은 앙드레 바쟁이 정립한 리얼리즘 영상미학에만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이고 신선한 형식을 고안해냈다.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단일한 이미지이고 영상은 연속적인 이미지의 모음이다. 사진은 한 이미지를 보며 할 수 있는 상상의 범위가 너무나 넓다. 영상은 이미 정해진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즉 답이 있기 때문에 상상의 범위가 좁다. 너무 넓고 좁은 것은 상상력과 흥미를 자극하는 데 제한을 둔다. 그 중간인 이 형식은 적절한 흥미를 부여하면서 상상의 제한에서 좀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레이션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나레이션에 크게 의존한다. 이 영화는 마치 sf 장르의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를 모아 그것을 나열해 만든 영화 같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문학의 범주 안에 걸쳐져 있다고 느껴졌다. 따라서 연속된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만으로의 스토리 텔링에 다른 영화만큼 무게를 두지 않았다. 문학 영화 사진 모두의 범주에 걸쳐 있는 느낌이다. 이미지가 있어서 배경묘사와 인물묘사를 할 필요가 없어 좀 더 간결한 나레이션이 가능한 것이 문학과 차별화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