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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 직장인 May 16. 2021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는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보는 글입니다. 특별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발행 주기도 없습니다. 분량도 제멋대로이고 다소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날것의 저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해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암기 능력 없기로 꽤나 자신 있는 제가 수십 년 만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떠올렸더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생각난 것입니다. 어린 시절 태권도장을 다니며 매일 가슴에 손을 얹고 외웠던 이 문구가 그만큼 제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태권도라는 국기를 배우면서 상당히 비장하게 맹세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다시 저 문구를 생각해보니 상당히 국가주의적 생각이 깔려있어 보입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을 희생시키더라도 국가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이니까요.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국가주의적 생각이 있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만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국가가 이상 사회로 가는데 중간 단계에 필요한 과정 정도로 생각한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아나키즘을 같은 사상도 존재하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국가의 필요성은 인정할만하고,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말도 충분히 받아들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국가주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모든 국민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국가의 입장에서 좋고, 개인 역시 자국이 성장하는 상황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정당함과 정당하지 않은 것의 구분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독재자가 항상 주장하는 논리가 바로 "국가를 위해"입니다. 이미 정계를 은퇴하거나 크게 패배했던 정치인의 복귀 논리도 항상 "국민이 원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가 붙습니다. 악독한 고문을 일삼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도 국가를 위해 고문을 저질렀죠. 잘못을 저지른 대기업 총수도 "국가 경제에 타격을 막기 위해"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시야를 확대해보면 중국의 과도한 티베트 탄압이나 역사 왜곡 역시 "국가를 위해" 저질러지는 일이며, "국가를 위해" 방사능 오염수 방류가 안전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사실 "국가를 위해"라는 단어는 모든 잘못을 가리거나 논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만능키가 됩니다.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국가를 위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다가 잘못을 하였을 경우, 즉 동기가 선했지만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사면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를 위하지 않았음에도 타인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이런 단어를 쓰는 사람들도 많아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진정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명예에도 누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타인의 공격을 막아내는 "국가를 위해"라는 단어 외에도 타인을 공격하는 "빨갱이"라는 만능키도 존재합니다. 복지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을 "빨갱이"라 부르기도 하고,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도 "빨갱이"라고 부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싸잡아서 "빨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똑같은 복지 정책을 추진하면 "국가를 위해"가 된다는 모순된 주장도 많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만능키가 존재함으로 인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비난이 하도 거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도 빨갱이로 매도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체 검열을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마다 다른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렇게 대화를 차단하는 말이 존재함으로써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게 되며, 논리적인 사유가 생기기가 힘듭니다.




어떠한 주장이 항상 옳다면 그 밖의 주장을 무시하고 매도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주장도 항상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통해 인간의 수준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간일 것입니다. 세상이 항상 대화와 논리로 돌아갈 수만은 없지만, 저런 프레임을 일단 걷어내야 조금 더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 행동하고 희생하는 것을 말릴 이유는 없지만,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타인이 국가를 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만 멈춰도 훨씬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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