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범한 직장인 Apr 04. 2020

소시오패스와 자본주의

일상으로의 초대

일상으로의 초대는 그때그때 생각을 적어보는 글입니다. 특별한 체계도 없고 형식도 없고 발행 주기도 없습니다. 분량도 제멋대로이고 다소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정돈되지 않았더라도 날것의 저를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해봅니다.
기차선로에 5명이 묶여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선로를 바꿔야 하는데 그쪽에는 1명이 묶여 있다. 레버를 당겨 선로를 바꿀까요?


과거에는 듣지 못했는데 최근에 상당히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공감능력입니다. 공감 능력이라는 단어 자체가 상당히 의미를 뚜렷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처음 들으면서도 이해가 잘 되었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공감 능력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단어가 인기가 있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두 단어는 몇 가지 특징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상이 완벽한 법과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이 공감 능력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우리가 법조문을 모두 외우지 않고도 발생하는 많은 상황에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공감 능력 때문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 상황에서 우리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가끔 세상이 소시오패스를 장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하는 행동과 결정에 의해서 제 동료 혹은 업체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약에 따라 그들에게 이행을 요구하고, 때로는 법적으로 따져야 합니다. 제가 그 사람의 생활을 공감하여 봐주게 되면, 저는 제 회사와의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될 것이고, 때로는 부정에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 항상 일을 못한다고 구박을 받던 과장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일을 너무 안 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자신보다 훨씬 후배 사원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고도 뭐라 말하지 못하던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야근을 하다가 그분이 전화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 아빠 곧 갈게. 그래그래. 사랑해"


그 일 못하는 과장님한테 너무나도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저분도 한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업무 태만에는 화가 나기도 하고, 때때로 싫은 소리를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정말 우리는 자본주의에 잘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과장님의 사정은 안쓰럽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밥값을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내가 내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제가 위치가 바뀌어서 그분을 자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자르는 것이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아이러니하게 공감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시오패스를 장려하는 사회가 자본주의라면 과한 생각일까요?




실제로 우리 주위에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고,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 중에 소시오패스가 많다고 합니다. 여러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흥분하지 않고, 공감하지 않고 회사의 방침대로 척척 일을 해나가는 사람은 회사에서 가장 바라는 회사형 인간일지 모르겠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최선의 판단을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생기는 것을 가끔 느낍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소시오패스 성향 없이 회사생활을 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부딪히는 수많은 상황에 일일이 감정을 소모했다가는 몸이 버텨나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회사에서 엄청나게 힘든 프로젝트를 맡으신 분이 몇 년 사이에 심하게 늙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정을 생각하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 사회가 용납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계 부품처럼 생활을 하다 발생하는 문제는 악의 평범성에 나온 윤리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므로 다음에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차선로 질문은 가벼운 소시오패스 테스트입니다. 물론 이런 테스트에 소시오패스 성향이 나왔다고 그 사람이 소시오패스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회사 사람들 여러 명에게 이 질문을 해보았는데 놀랍게도 전원 소시오패스 성향이 나왔습니다. 이 질문의 포인트는 망설임입니다. 5명의 죽음과 1명의 죽음 속에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은, 1명의 죽음에 대한 공감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했을 때 모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1명의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회사에서 늘 빠른 선택을 강요받다 그 연장 선상에서 5명보다는 1명이 죽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빠르게 도출한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이 당연히 모두 소시오패스는 아니지만, 회사의 업무가 얼마나 소시오패스 성향을 강요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회는 모두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뛰는 삭막한 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이를 잘 조절해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공감 능력 제거를 강요받는 느낌입니다. 우리 사회도 예전보다 자본주의가 발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분들은 정의 없어졌다던지, 사회가 삭막해졌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실제로 개인주의 성향은 많이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을 발전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만한 것 같습니다.

이전 11화 N번방은 또 뭐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