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티베이터 Oct 25. 2020

나는 때로 마음껏 어설프고 싶다.  


어설픔을 감추려 하다



직장들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였다. 동료 하나가 “우리 셀카 찍을까요?” 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곳저곳을 훑었다. 셀카의 고수였던 그녀는 찰나의 순간에 테이블의 물리 구조와 핸드폰 카메라의 앵글 형성을 계산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나에게 넘기지 않기를 기도했다. 내가 셀카를 찍으면, 그 사진은 휴지통으로 직행이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사진 찍는 일이 어설프다. 


기어이 카메라는 유인원 같이 팔이 긴 나에게 넘어왔다. “아, 그럼 제가 찍어볼까요?”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받았다. 팔을 길게 뻗었다. 앵글의 구도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뻗음이었다. 포즈나 표정이 준비되지도 않은 순간에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셀카의 고수에게 사진을 건넸다. 그녀의 표정이 어둡다. “나 사진 잘 못 찍어.”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됐다. 소심함 때문인지 이상한 자존심 때문인지, 누구의 사진첩에도 저장되지 못할 사진을 찍고 말았다. 


나는 이럴 때가 많다. '좀 더 능숙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 욕구'와 '누군가 내 어리숙함으로 인해 나를 얕잡아 볼까' 하는 생각의 믹스가 이런 행동을 만든다. 셀카 찍는 일이야 별 일 아니지만, 직장 등 중요한 일에서 내 부족한 부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구해야 할 일에서도 이런 유혹은 등장한다. 


어느 순간 어떤 일에도 어설퍼 보이고 싶지 않은 욕구가 생겼다. 항상 능숙해 보이는 나를 보이고 싶었다. ‘좀 어설프면 어때’하고 스스로에게 말할 때도 있지만, 어설퍼 보일 상황이 되면, 그렇지 않은 척 가식을 떤다. 


어설픔의 미학 



어릴 때는 많은 것이 어설펐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도 어른들이 볼 때는 한없이 어리숙했을 것이다. 이제는 익숙하고 능숙한 일이 많아졌다. 숙련된 전문성으로 남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능숙해지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능숙해졌어야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라는 존재가 세상이라는 끝없는 경쟁의 구도에 던져졌음'을 깨닫는다. 생존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서늘함을 알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어설픔과 어리숙함은 용납되기 어렵다.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내 어리석음은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소재가 되지만, 직장에서의 어설픔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생존 확률이 낮은 생명체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그널이 된다. 


하지만 어설프고 어리숙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야 능숙해질 기회를 얻는다. 사실 어리숙하지 않은 척하는 일은 쉽게 들킨다. 나의 어리숙함은 타인의 능숙함을 높이 평가해줄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삭막한 사회 속 관계에서 때로는 어리숙함이 관계의 긴장을 풀고,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도구가 된다. 


능숙함과 숙력됨을 기본적으로 탑재해야 하는 사회에서 어설픔을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어설픔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직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내 어설픔을 마음껏 보일 수 있는 친구나 가족이 그립다. 더 가져야 하고, 더 나아져야 하는 내 자아를 쫓지 않아도 되는 그 자리가 그립다. 어설픔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모든 시작은 어설프다. 어설플 때는 모든 일이 배움의 대상이다. 순간순간이 성장을 이룬다. 어설플 때는 낯설다. 모든 변화가 경이롭다. 자전거가 내 두발에 의해 움직이는 첫 번째 사건의 경이로움을, 당당하게 쫄바지를 입고 오르막길을 사이클을 타는 라이더는 모른다. 


어설픔에는 미학이 존재한다. 



나는 때로 마음껏 어설프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재미와 멀어진다. 놀이터였던 세상은 전쟁터가 된다. 웃음소리 대신 경쟁의 포화 속에 총성이 들린다. 마음껏 어설퍼도 됐던 세상은, 능숙함으로 가장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어리숙함을 보이는 일은 남들이 쉽게 나를 이용하도록 놔두는 자살 행위가 된다. 


하지만 나는 어설픔을 회복하고 싶다. 어설픔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작은 변화에도 기뻐하고 설레고 싶다. 반복된 익숙함으로 뇌가 자동으로 모든 정보를 처리한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조금은 시간이 걸리고, 에너지가 소비된다고 하더라도 작은 거 하나에 눈길을 주고, 내가 모르는 세상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싶다. 


그래도 주변 사람을 위해 사진 찍는 방법은 좀 배워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리얼 쿨함은 어디에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