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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베이터 Oct 27. 2020

경청은 어렵다.   

국정 감사가 끝났다.


 

폭풍 같은 국정 감사 일정이 끝났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티브이에 나오는 국정감사 현장을 봤다. 순간 곤란한 표정을 감추는 이들의 모습을 감상했고, 빠른 템포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이들의 모습도 봤다. 정치인들은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표정관리를 잘하는지, 어디서 저런 확신을 갖고 상대를 몰아붙이는지 나로서는 놀랍다. 동문서답을 하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 경이롭다. 


국정감사를 보다 평소 국회의원의 대화의 풍경이 떠올랐다. 평소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정치인들의 대화를 자주 들었다. 대화라기보다는 고도의 전략이 동반된 작은 전쟁이다. 대화는 고도의 정치 공학적 계산으로 이루어진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듣는 척하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정당의 입장을 고려한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 듣는 척하는 이’가 있다.


“의원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상대의 말을 들은 국회의원은 정중하게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데’라는 접속사가 붙는다.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푼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봐’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이어서 말하는 의원도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상대에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청취하고 있는 유권자에게 호소한다 


'경청'은 어렵다. 


대화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경청’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일은 힘들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 스피치 학원도 다니지만, 경청을 하는 방법은 어디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못 배워서인지, 난 ‘경청’을 못한다. 아니 경청하기 싫다. 내 생각 속에는 ‘내 생각을 좀 들어봐.’, ‘넌 이런 생각할 수 있어?’, ‘이런 건 몰랐지?’이런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말하고 싶은 내용, 원하는 것, 필요한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에 집중한다.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내 안에 존재하는 소음' 때문이다. 이 소음은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 ‘남보다 나를 높은 곳에 놓고자 하는 마음’에서 탄생한다. 이 소음이 들리는 순간, 다른 사람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심리학 지식에 기대어 본다면,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확증편향’이라는 인지적 편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은 자신이 믿고 싶고, 기대하는 현실만을 보게 한다. 상대의 정신세계와 언어에 존재하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내 욕구, 내 신념에 기초해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취사선택한다. 확증편향이 작동하면 이미 내가 듣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은 정해져 있다.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이 내 신념이나 욕구를 방해하기 시작하면 불편하고 불쾌하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집중해서 듣고, 내 자아를 보호하고, 내 결핍을 채우려는 방향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한다. 경청을 하려면, 이런 보호본능과 욕구를 잠재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난 경청이 어렵다. 요즘 나오는 좋은 이어폰에는 ‘주변 소음 제거’ 기능이 있다. 특정 주파수의 소리를 차단함으로 주변 소음을 차단하는 기능이다. 친구의 최신 이어폰으로 이를 경험해 봤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솨~’하는 소리와 함께 고급 이어폰은 순식간에 소음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을 고요한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그야말로 마술이다. 


좋은 이어폰이 갖춘 ‘주변 소음 차단 기능’과 같이, 경청을 하려는 이에게는 내면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내면의 공간이 변형되지 않고는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늘 내 자아를 보호하고 싶고, 결핍을 채우고 싶은 나는, 언제쯤 그런 기능을 탑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차단할 자신이 없는 나에게도 ‘경청’의 능력의 높일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주파수다. 대화를 통한 소통은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주파수가 일치해 갈 때 소통은 이뤄진다. 평소 소통이 어렵다면, 주파수를 맞추는 감각이 부족하다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다. 소통의 과정에서 주파수를 맞추는 일은 인간의 뇌가 갖춘 놀라운 기능이다. 말의 빠르기, 억양, 리듬, 톤이 갖는 언어적, 음성적 요소부터, 눈의 깜박임, 고개의 위치, 손이나 몸의 움직임이 만드는 비언어적 요소가 만드는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아 때문에 ‘주변 소음 기능’을 탑재하기 어렵다면, 주파수를 맞추려는 노력으로 경청을 연습할 수 있다. '주변 소음 차단 기능'은 포기하더라도 주파수를 맞출 안테나 정도는 달아봐야겠다. 




귀를 기울이면, 비로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린다. 상대가 하는 말이 들린다.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사람과 나의 내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된다. 대화의 시작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대화를 방해한다면, 그 소리를 줄일 준비를 해야 하고, 상대의 말에 주파수를 맞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확증편향을 경계하고, 생각을 바꿀 용기를 내야 한다. 경청은 '물리적 작용이자 화학적 작용'이다. 


스피치 학원 말고, 경청 학원은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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