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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베이터 Oct 28. 2020

연결됐나요?

이직을 한지 얼마 안 된 사무실은 답답했다. 넥타이를 살짝 풀어본다. 그래도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식은땀이 난다. 책상 위에 있는 자료를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궁금한 내용을 물었다. 바빠서인지 내가 건넨 자료를 슬쩍 보더니 자신의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빠르게 답을 해주었다. 여전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무능력해 보일 것 같아서’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심호흡을 해본다. 


문득 이전 직장에서의 사무실 풍경이 떠오른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껏 웃던 모습이 선하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는 정감 어린 인사를 나누며, 퇴근길을 향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같은 공간이라도 그 공간에 대한 정서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직 후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전 직장도 처음에는 답답하고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 공간에서 느끼는 긴장감은 친숙함으로 바뀐다. 하지만 간혹 도저히 그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고, 친숙함이 스며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이나 환경이 적응하기 힘들어서 직장 사람들과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그러하다. 적응을 하지 못하는 직장인에게 기존에 형성된 사무실 내 관계는 더 주눅 들게 만든다. 그들의 친밀함이 때로는 나에게 폭력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누군가와 연결됐다는 느낌이 없는 공간은 인간의 실존적 외로움을 건드린다. 


인간에게는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존재한다. 



인간은 다양한 욕구를 갖고 살아간다. 그 가운데 ‘관계성’이라는 욕구가 있다. 관계성은 ‘내가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 관계성이 채워질 때 내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살 만한 세상으로 여겨지고, 일상의 의욕과 에너지가 회복된다. 아무리 많은 성취를 갖고 있고, 부를 이루고 살아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됐다는 피드백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불행하다. 


휴대폰에 수천 명의 연락처가 있고, 개인 SNS에 나를 향한 끝없는 호감이 주렁주렁 달리고, 핵인싸가 돼도, 자신 스스로 누군가와 긴말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구체적인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외로움에 갇혀서 지낸다. 관계성이 충족되고 있음은 수치로 증명되지 못하고, 타인의 판단으로 결정되지 못한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감에 만족하는 흐뭇한 미소로 증명된다. 


메신저나 SNS는 이런 관계성의 욕구를 겨냥한 서비스다. 관계성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향한 마케팅과 기술개발이다. 하지만 관계성 욕구의 채움은 기술개발과 비례하지 않는 듯하다. 사회 속 소외와 단절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생각, 삶을 나누지만 이상하게도 관계성은 필요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 덩그러니 놓인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끊임없이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완성해 나가야 한다. 그의 시선에 존재하는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하고, 외롭다.' 외로움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야 하는 당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위대한 철학자의 말이라 일단 수긍해 본다. 하지만 나에게 인간 실존의 정의는 시시각각 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나타나고, 내 깊은 고민에 진심 어린 공감을 보내는 눈빛을 가진 이를 만날 때,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과 조우할 때. 실존에 대한 정의는 달라진다.  삶은 처절한 고독을 견뎌야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껏 내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연결됨을 누리는 것이 된다. 세상은 '홀로 내던져진 삭막한 곳'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이 충분한 살만한 곳'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타인과 친밀함을 맺어가는 일은 숭고한 일이다. 따뜻한 손길이, 위로의 말 한마디가, 공감의 눈길이 누군가의 실존의 외로움을 달랜다. 유독 지쳐 보이는 직장동료를 발견하고 그의 책상 위에 몰래 올려놓는 커피 한잔이 그로 하여금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한다. ‘삶은 지독한 고통의 연속이라고’ 신음하는 친구를 향한 전화 한 통이 삶의 작은 의미를 선물한다.  




가을이 깊어 가고, 낙엽이 떨어진다. 낭만과 고독이 뒤섞인 시간이다. 평소 가을남자라고 우기던 나는, 이런 시간에 고독한 사색이라는 똥폼을 잡고 싶어 진다. 하지만 참아야겠다. 낭만을 찾는 대신, 무언가로 고민하고 있을 친구 녀석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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