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많은 알레르기가 존재한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물질은 피부에 닿거나 입으로 들어가면, 몸에 극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고통을 준다. 특정 알레르기를 가진 이들은 소수지만, 요즘 대다수의 젊은 층이 보유한 알레르기가 있다. 바로 ‘꼰대 알레르기’다.
대한민국엔 수많은 꼰대들이 살고 있다. 거대한 꼰대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안타깝지만 많은 이들이 눈치도 못 챈 상태로 감염됐다(나도 감염됐지만, 잘 숨기고 있다).
꼰대는 과거 드라마 대사에 자주 등장하던 용어다. 친구가 주인공을 향해 “야 꼰대가 너 찾아” 이런 식이다. 여기서 꼰대는 선생님이다. 꼰대는 '낡은 사고방식을 강요'하거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자신의 생각, 방식을 중심에 두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가르치거나 알려주려는 태도를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
물론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급격한 사회변화가 자연스럽게 기성세대를 꼰대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속도를 알 수 없는 사회변화는 직장 상사를, 엄마 아빠를, 삼촌 고모를, 형 누나를 꼰대로 만들었다. 전통을 고수하고 이어가려는 태도보다는, 새로운 정보에 적응하는 길이 생존에 유리한 시대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물론 기성세대만 꼰대가 되는 건 아니다. 요즘 젊은 꼰대들의 세력이 강하다. 어린 나이에 꼰대질을 배우고 익혀 열심히 꼰대질을 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 많다. 어린 나이에 동년배에 비해 높은 위치로 갔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왜 꼰대가 되어갈까? 좀비처럼 다른 꼰대에게 목이라도 물린 걸까? 아님 호흡기를 통해 꼰대 바이러스가 침투한 걸까? 사실 꼰대는 자아 중심적 태도와 불안감에서 자란다. 나를 중심에 두는 미성숙한 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자아가 위축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감, 이런 심리가 꼰대를 만든다.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정과 존중을 얻는 이들은 꼰대 현상을 보이지 않는다. 결핍을 향한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상대의 반응에도 그리 예민하지 않다. 꼰대질 대신 자연스러운 태도와 여유, 배려를 보여준다.
반대로 직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위협을 느낀 이들은 꼰대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꼰대질이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보호한다고 믿는다. 꼰대질로 원하는 건 진심 어린 존경과 존중이 아니다. 꼰대질을 하며 느끼는 욕구 충족으로 불안감을 해소다.
꼰대가 된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다 너를 위한 충고야”
사실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충고다. 내 존재를 확장시키고, 불안감을 줄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부하 직원이 나의 불안함을 눈치챌까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꼰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숨기고 싶어 뱉는 말이다.
꼰대 바이러스도 백신이 존재할까? 존재한다. 물론 화이자나 모더나의 발표가 아니다. 내 뇌피셜이다. 꼰대 바이러스는 '성장에 대한 욕구'다. 성장은 인격, 자아의 성장일 수도, 지식과 기술의 성장일 수 있다. 나이가 들어도, 지위가 높아져도 성장을 향한 욕구가 존재하면 꼰대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다.
성장에 대한 욕구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배우고 익힘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성장 욕구를 만든다. 성장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만드는 수치심이 줄어든다. 수치심이 줄기에 보호 심리가 약해지고, 보호 심리가 해제되면 꼰대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한다.
내 주변엔 존경스러운 관리자가 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도움을 요청한다. 부족함을 감추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부하 직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능력이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높은 지위에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음을 존경한다. 지속적으로 배우려 하고 성장하려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존중과 인정은 꼰대질로 얻을 수 없다.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태도가 존중을 이끌어 낸다.
나도 나이가 들수록 꼰대질을 향한 강한 욕구가 일어난다.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내 방식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나의 불안함을 인식한다. 진심으로 타인을 격려하거나 도우려는 마음인지, 나의 불안함을 감추려는 의도인지를 돌아본다. 남아있는 힘으로 꼰대가 되려는 충동을 이겨낸다.
다행히도 난 라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