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애의 끝이 짧은 결혼이 될까 봐

[소설] 결혼 자격증도 필요한 시대

by 지제이

긴 연애의 끝이 짧은 결혼이 될까 봐 무서워


"난 여기서부터 저기 집 앞까지 눈 감고도 갈 수 있어."

기안은 정말 눈을 감고 걷기 시작했다.

상아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첫 데이트 이후 지난 9년 동안 수없이 바래다주고 데리러 오고. 땅바닥에 기안이의 발자국이 파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닌 길이다.

기안은 기안이 식으로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이만큼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왜 그러는데. 심심한가 봐."

상아는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딴소리를 했다.

기안이 멈추고 환하게 불 켜진 상아 집을 올려보며 말했다.

"올라가면 커피 한잔 주나?"

"오늘은 그냥 가. 미진이 소개팅 망해서 예민해."

"또? 아유, 미진이가 빨리 시집을 가야 우리 상아가 편할 텐데. 나도 그렇고."

기안이 느끼한 미소를 날리며, 양팔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상아도 기안의 품속으로 쏙 들어갔다.


기안의 품속에서 상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지금도 좋지 않아?"

"결혼하면 몇 배로 좋을걸."

"하루에 500쌍이 결혼하고, 200쌍이 이혼한다고."

"이런, 직업병이 중증이십니다."

기안이 장난스레 상아의 이마를 짚었다.

"알아. 내가 오바하는 거 맞을 거야. 근데 솔직히 좀 무섭긴 해. 결혼했다가 서로 실망하면 어떡해. 오늘 십 년이나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6개월 만에 이혼하는 사례도 봤어."

"니가 왜 무서운 줄 알아?"

"응...?"

"니가 나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래서 무서운 거야. 알았어?"

기안은 상아의 이마에 꿀밤을 톡 때리며 말했다.

"얼른 들어가. 내일 대훈이 카페에서 12시. 잊어먹지 말고."

내일 약속까지 챙기고 돌아서는 기안의 어깨가 왠지 처져 보인다.

결혼, 기안에게는 당연한 일인데, 왜 나는 이토록 복잡한 걸까.

상아는 슬펐다.

어느 틈엔가 자신이 긴 연애의 끝이 짧은 결혼이 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게.


하루 종일 듣는 말이 이혼 아니면 결혼


심란한 마음으로 들어선 집안 공기는 역시나 싸했다.

상아는 바로 눕고 싶었지만 그래도 미진이 방부터 열어보았다.

"괜찮니?"

"우울하죠."

"오늘은 무슨 폭탄이었는데?"

"최루탄요."

우울하다면서 묻는 말에 대답은 다 하는 미진이는 오늘 소개팅을 하고 들어왔다.

이십 대에는 결혼하고 싶다는 스물아홉 살 미진이는 3년 전부터 상아와 함께 살고 있는 고향 동생이다.

부모님끼리도 잘 알고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지내온 사이라, 친동생 상미가 시집간 후, 서울에서 취직할 때까지, 한 3개월만 같이 지내도 되겠냐고 할 때, 굳이 안된다고 할 건 없었다.

3개월이 3년이 되어서 그렇지.


"최루탄이면...?"

최루탄은 어떤 남자라는 건지 상아는 확 감이 오지 않았다.

답답하다는 듯 미진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상세 설명을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향수 냄새가... 윽! 아후, 눈이 다 따갑더라고요. 그뿐이 아니에요, 짝퉁 같은 짝퉁으로 시계며, 신발이며 쫙 휘감고 있는데 내가 다 민망해서 어딜 봐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여간 엄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공무원이면 괜찮다고."

미진이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누웠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인연이 다 있다잖아."

상아는 말하는 순간 스스로 꼰대 같다고 느꼈다.

"진짜 이러다 우울증 오지 싶어요. 벌써 스물아홉인데 아직도 알바나 하고 있고, 남친도 없고. 집에선 시집가라고 들들 볶고. 누군 가기 싫은가."

"그렇다고 아무나 하고 결혼할 수는 없지.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눈을 반쯤 감아라. 이런 명언도 있단다."

"아, 어쩌라고요."

미진이 이불 속에서 몸무림을 쳤다.


상아는 자신이야말로 피곤한 인생이다 싶었다.

어떻게 하루 종일 듣는 게 이혼 아니면 결혼이냔 말이다.

"다들 결혼이 인생 최대 숙제니, 기안이 말처럼 결혼도 시험 보고, 점수 맞는 사람들끼리 하고 그러면...."

"결혼시험요?"

상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진이 까르르 웃어댔다.

"기안오빠가 그랬어요? 결혼시험? 와, 기안오빠 진짜, 대박, 귀여우신 거 같애요."


저게, 오냐오냐 하니까. 상아는 기분이 나빴다.

미진이가 기안이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아니, 기안이를 떠올리며 웃는 것 자체가 싫은 것 같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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