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학력 위조할 뻔

by 지제이

"사장님, 제가 말씀드렸던 지제이 씨입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꽤-- 오래전, 모출판사 사장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작업을 할지는 이미 조율된 상태였고 만나서 식사나 하자는 출판사 사장님 권유로 갖게 된 자리였죠.

"사장님, 지제이 씨는 S여대 국문과를 나왔어요."

지인의 말에, 저는 황당해서 지인을 바라봤습니다.

지인은 괜찮다고 눈짓을 했고,

"오, S여대? 좋은 데 나오셨네. 우리 딸이 고3인데, 걱정이에요. 음대 가겠다고 하는데."

사장님은 반주부터 한잔 걸치면서, 자기 딸 얘기만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S여대라뇨, 아닙니다!

발끈해서 정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정색을 하자니, 소개해준 지인의 입장이 뭐가 될까도 싶고, 순간 쎄-해질 분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가시방석에,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식사를 끝내고 사장님과 헤어진 후 저는 지인에게 참았던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어요? 제가 무슨 S여대를 나와요?"

"아유우, 괜찮아. 누가 확인할 사람도 없어."

지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젓더니, 겨우 한다는 말이 저를 더 비참하게 했습니다.

"그게... 그 사장님이 학력을 좀 따져. 대학 안 나온 사람은 좀 못 미더워하는 게 있어. 이렇게 얘기해 놔야, 앞으로 일하기 편할 거야."

고로, 저를 위해서였다는 거였습니다.




아홉수라는 게 있기는 있나 봅니다.

스물아홉 되던 해였습니다.

엄마가 자궁암으로 입원하시고, 그 며칠 뒤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연히 남동생의 사고는 엄마에게 비밀이었습니다.

얘가 정말 바쁜가 보다 하며, 병원 한 번 안 오는 남동생 걱정을 하시는 엄마께, 남동생은 저 멀리 지방에 있다, 해외 출장을 왔다 하면서 전화로 안부만 물었습니다.

엄마는 수원, 남동생은 광명에 있는 병원이었습니다.

저는 양쪽으로 다니며 간병을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다니던 출판사마저 경영난으로 대표가 바뀌는 상황이 되자, 저는 퇴직을 결정했습니다.

어차피 규칙적인 출퇴근도 못할 상황이라, 프린랜서로 일하기로 한 거죠.


그리고 제 사정을 알게 된 지인이 마침 일을 연결해 준 거였습니다.

제가 할 일은 한 달에 3권 정도, 그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의 교정교열과 리라이팅을 해주는 거였습니다.

노트북만 들고 다니면 어디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저에게 딱이었습니다.

설마 학력을 속여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요.

기분이 묘하기도 했습니다.

모욕적이기도 했다가, 웃기기도 했다가...





다음날, 일단 약속은 한 터라 저는 출판사로 갔습니다.

사장님은 기다렸다는 듯, 직원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셨습니다.

"앞으로 교정이랑, 글이랑 봐주기로 한 지제이 씨예요."

사무실에는 한눈에도 앳돼 보이는 여직원 둘과 남자 직원 한 명이 있었습니다.

경리부 1명, 편집부 1명, 그리고 영업부 1명.

각자가 자기 포지션을 말하면서 통성명을 하는데, 역시나 사장님이 확인 사살을 했습니다.

"지제이 씨는 국문과를 나왔어요. 출판사 경력도 많으시니까, 궁금한 거 있음 물어보고 그래요."

"네~!"

직원들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는 사람 좋은 미소로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일을 못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찻잔을 앞에 두고 앉은 저는, 자세는 어색했을지나 뭔가에 초월한 사람처럼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여유 있는 척했던 것 같습니다.

"사장님 저 S여대 안 나왔어요. 여상 나왔어요. 여상 나와서 직장생활 하다가, 출판일에 관심이 생겨서, 1년 과정 편집학원 다녔는데, 다행히 바로 취직이 돼서, 그 뒤부터는 현장에서 일 배웠고요."

"......"

사장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소개해준) ooo 씨가 저 위한다고 그런 거 같은데..., 빨리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흣."

세상 어색하게 웃는 저를 보며, 사장님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일만 잘하면 되지, 학력이 무슨 상관이에요?"

"...?"

뭐지? 저는 또 한번 황당했습니다.

사장님의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앞에 있다고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ooo도 참, 거참 이상한 사람이네. 허허."

사장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옆에 있던 출력 원고를 제 앞으로 밀었습니다.

"이번에 봐줄 원고는 이거예요. 1차 교정 보신 후에 우리 편집부로 보내주세요. 파일로도 보내라고 할게."

"네..."





그 뒤로 1년 넘게 저는 그 출판사와 일을 했습니다.

그동안 사장님이 학력 관련해서 저를 불편하게 한 적도, 누군가의 학력을 따지는 걸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 이해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ooo 씨는 왜 그랬을까.


예상컨대 이렇습니다.

어느 날 ooo 씨는 '사장님이 학력을 따진다고 생각할 만한 말을 들었거나,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앞뒤 자초지종이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그 장면이 기억에 박히고, 고정관념이 되고, 확신하게 된 거죠.

그건 저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저 역시 어느 한 장면을 뇌리에 박아놓고 그것만이 진실인 양 판단하고 얘기하기를... 얼마였을까.

얼마나 무수한 오해와 착각을 하며 살았을까 싶었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이런 말 참 많이 썼는데, 그 이유만으로 절대불변의 관념을 갖지는 말아야겠다 싶더군요. 언제나 내가 잘못 알 수도 있다는 것,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다고 생각하게 했던 한바탕 해프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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