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드엔딩은 사람이 만든다

혼자 떠나보았던 여행, 에피소드 (1)

by 지제이

"여행은 혼자 하는 거지. 친구들이랑은 놀러 가는 거고."

이 말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심취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괜히 센티해져서 거리를 하염없이 걸을지언정 여행까지 혼자 갈 용기는 없었죠.

그러다 이십 대 후반, 나름 감성감성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새해 연휴 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자꾸만 맴도는 생각은 실천하게 된다더니, 갑자기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제 발길이 무작정 터미널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혼자 가는 여행 한번 해보자. 목적지도 정하지 말고, 터미널로 가서 바로 떠나는 버스를 타겠어.

그렇다고 혼자 어딘가를 다녀보자였지, 이 겨울에 고생스러운 여행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옷차림은 평소대로 익숙하게 입고 나갔습니다.

밤색 롱코트에 검은색 단화, 검은색 커다란 숄더백을 매고요.

터미널에 도착하니 바로 출발하는 게 강원도 원주행이었어요.

어디를 가든 대한민국 땅이니 돌아올 걱정은 하지 않기로 하고, 티켓을 끊었습니다.


드디어 출발~ 버스는 점점 낯선 풍경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아... 좋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매일 쳇바퀴 돌듯 똑같은 곳만 맴돌던 나 자신에게 크게 한 턱 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거참 꽤 괜찮더라고요.

버스에 앉으면 일단 창에다 머리를 박고 잘 생각부터 하던 저였는데, 확실히 세포들도 신선한 체험에 놀랐는지 가는 내내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종착역인 원주에 내린 저는, 역 밖으로 나서며 일단 제 옷차림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봐도 여행객이 아니라 딱 원주에 사는 사람처럼 보일 테니, 여행객 노려서 바가지 씌우는 이상한 사람들한테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일단 배는 고파서 역 근처 분식집에 가서 간단히 라면을 먹었습니다.

흘깃흘깃 혼자 식당에 온 젊은 여자를 왠지 안쓰럽게 바라보는 주인 아주머니의 시선조차 신선했습니다.

요즘은 혼밥도 자연스럽지만 그때만 해도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좀 귀하던 시절이었죠. ㅎ


분식집에서 나와 다시 무작정 걸었어요.

그러다 무슨 절(이름이 기억이 안 나요 T.T) 안내판이 보이기에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가깝지 않을까 했는데, 제법 산길로 들어가더군요.

길 양쪽으로는 돌 틈, 풀 틈 사이로 눈덩이들 쌓여 있었고, 가운데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은 눈이 녹아 질퍽질퍽 흙탕물이었습니다.

요리조리 피하면서 걸었지만 허술한 단화 밑창으로 쉽게 쉽게 들어온 물기에 금세 양말이 축축해지더군요.

신발이라도 제대로 신고 올걸. 역시 단화는 아니었어.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어 계속 걸어 올라갔습니다.

절에 도착한 후 천천히 돌아보다가, 사찰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어요.


"십우도예요. 십우도 알아요?"

한 스님이 청소를 하던 중이었는지 빗자루를 들고 다가오셨습니다.

"아, 네... 십우도. 들어봤어요. 소를 찾아서 떠난다... 그런..."

"불자들이 본성을 찾기 위해 하는 수행 단계를 동자가 소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비유한 그림이에요. 모두 십 단계라서 십우도라고 하죠."

그러고 보니 모두 열 개의 벽화가 쭉 이어져 그려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그림은 깨달음을 얻은 동자가 큰 포대를 매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한테 가는 동자가 엄청 당당해 보여요. 해피엔딩이라 좋네요."

'해피엔딩'이란 말에 스님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내가 불교를 가벼이 말한 건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우리 엄마도 불교라고 얼른 말할까,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스쳤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스님이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럼요, 부처님은 해피엔딩만 만들어요. 새드엔딩은 사람이 만드는 거고."


새드엔딩은 사람이 만든다?

왠지 그 말이 가슴에 뇌리에 박히더군요.

스님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상관없이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법당 쪽을 가리켰어요.

하지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던 터라, 저는 너무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더니 부엌 쪽으로 가셨고,

곧 종이컵에 따듯한 김이 나는 차 한잔을 들고 나오시나... 했더니...

"커피, 커피. 내가 커피를 잘 타거든."

"에?"

딱 보니, 커피 하나, 프림 둘, 설탕 둘의 컬러를 띤 액체가 종이컵 안에서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커피 드세요? 저는 당연히 녹차 같은 거 주실 줄 알았어요. 하하!"

"어허, 그것도 고정관념이에요. 나 커피 좋아해. 하루에 세 잔씩 마시는데?"

커피부심이 느껴지는 스님의 모습에 저절로 추위도 녹아내리는 듯했어요.

그리고 진짜로 참 맛있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저는 절에서 나왔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새드엔딩은 사람이 만든다'라는 말이 귓전을 맴돌더군요.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어요. 누가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안 그래도 된다고 해도, 나는 늘 스스로 우울함, 불안함, 힘듦, 고민 따위를 껴안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인생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나...

그렇게, 커피 좋아하는 스님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화두로 삼아 나도 성찰이라는 걸 해보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성찰이라는 걸 길게 이어가기에는 내 발이 너무 축축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급한 일은 불쌍한 내 발을 뽀송뽀송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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