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정조시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이산’이 나오는 날이다.
밥을 잊고 열심히 TV를 시청중이다. 규민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고 은결이는 팬티만 겨우 하나 걸치고 뒹굴뒹굴거리고 있다. 드라마 이산이 끝나기가 바쁘게 은결이
“엄마 나 책 백권만 읽어주면 잠든대이”
이제 숫자 백도 안다.
“그래 알었다. 책 찾아와!”
히히거리며 큰방으로 쪼르르 책을 찾으러 들어간다. 오늘 구몬선생님이 주고 간 ‘책먹는 여우’책을 가져오라 했더니 좋아라 가져온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가끔 주인공 이름대신 아이들 이름을 넣어서 읽어주곤 하는데 이책은 유달리 자기 이름을 넣어 읽으면 무지 싫어한다. '책먹는 여우' 대신에 ‘책먹는 은결이’하면 정말 싫어한다. 그게 재미있어 나는 ‘책먹는 은결이’를 또 말해보았더니 은결이가 악악대며 운다. 알겠어 그냥 읽을께 하며 책읽는 중간에
"은결이는 책을 먹지 않아요." 했더니 은결이 표정이 시무룩해지더니 벽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돌아누워버린다. 슬픈 표정으로 있기에 외 그래 엄마가 은결이는 책을 안먹는다고했는데 했더니 은결이
“그래도 내 얘기도 넣었잖아”한다.
“그래 알았어”하고 그냥 책에만 충실해서 읽었다.
내가 책읽는 중에도 은결양 자기 수첩을 조물랑 조물랑 만지더니 다 읽어갈 쯤 조용해서 돌아보니 코 자고 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육아일기를 아이들이 다 자라서 읽으니 새삼 느끼는 것이 소중한 순간을 다시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만 기록을 남겨놔서 이 기록을 통해 아이들과 내가 함께 한 시간들을 되새김질하듯 읽으면서 그때가 연상이 된다. 그런데 조금씩 자라면서 나는 아이들에 대한 글을 써둔 것이 없어 내 아이들이 아기였다가 갑자기 성인이 된 느낌이 든다.
기록이 없어 아이들의 청소년 시절 중간토막이 어디론가 사라진 느낌이 든다.
자라면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고 학교를 마치고는 학원을 다니고 더구나 고등학교때는 한밤중에 들어오니 아이들 얼굴보고 얘기나눌 일도 잘 없어 기록할 일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둘 다 각자의 자췻방에서 홀로 살고 있고 아주 가끔 일이 있을 때 전화나 영상통화를 한다.
예전엔 한 배를 타고 함께 노저어가며 같은 곳을 바라봤다면 이젠 각자 작은 배에 옮겨타고 각자가 가고싶은 섬으로 노저어 가는 것 같다. 각자 다른 풍랑을 만나고 각자 다른 풍경을 보고 각자 다른 꿈을 꾼다.
큰 딸은 큰 딸대로 자기 꿈을 향해 노저어가고, 둘째는 둘째대로 자기 배를 타고 노저어가고, 나는 나대로 이곳에서 나의 노년을 향해 작은 배를 노저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