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을 통해 태어난 자식

그림

by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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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가끔 파리나 모기가 벽면에 붙으면 여지없이 미용사는 파리채를 잡고 타닥 벽을 향해 내리친다.

가끔 헛손질을 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맞아떨어졌다. 어떨 땐 종이를 돌돌 말아 급한대로 내리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속이 상하지만 어찌 말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파리와 모기의 시체가 무늬처럼 쌓여가는 그곳에 내가 그린 스케치가 있기 때문이다.

몇달전쯤 그 미용사는 벽에 걸게 헤어모델 그림을 세개를 그려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어찌하여 그렇게 하겠다고 말을 하고 집에서 종이전지를 세 장 사서 세 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려다주면 액자를 해서 걸어주겠다던 약속은 언제 잊어먹었는지 아님 그런 말한 적이 없는데 나만 그리 약속했다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

내가 가져간 그림을 미용실의 빈 공간에 척 붙여놓고 그날 이후 모기와 파리의 시체들을 거리낌없이 턱턱 붙인다.

껍데기를 입지 못한 나의 헤어모델 스케치들은 벽에 붙어서 날아오는 파리 모기 시체들을 얼굴에 턱턱 붙인채 울지도 못하고 얼룩이 져가고 있었다.

속이 상하는데 불편함을 표현하지 못했다. 나는 바보 아닌가?

어느날 나는 다른 미용실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계속 벽에 붙어서 파리 모기들의 시체를 얼굴에 하나 둘 덮어쓰고 있을 내 그림들이 맘에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날 시내 미용재료상에 들렀다. 한 장당 오천원하는 헤어모델 사진 세장을 사서 돌돌 말아서 버스를 타고 그 미용실을 다시 찾았다.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떠난 미용실은 배치가 달라져있었고, 나의 그림들 중 두 장은 낡은 미용실의 구멍을 메우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온 헤어모델 사진을 그 미용사에게 들이밀고 나의 스케치를 되돌려받아 나왔다.

그리고 그 미용실 밖에서 도저히 회복불가인 두장의 스케치를 내 손으로 직접 쫙쫙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형시켰다. 그중 다행히 한 장은 집으로 들고와서 값싼 판넬로 액자를 해놓았다.

그게 삼십년전쯤의 일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경험을 가끔 들어보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한 미술교사는 형님이 식당을 개업하여 식당에 걸 그림을 하나 달라고 해서 좋은 마음으로 그림을 하나 선물로 줬다고 했다. 그 식당이 영업을 하다가 몇 년이 지난후 폐업을 하게 되었는 모양이다. 어느날 그 식당에 가보니 자신이 정성스레 그려진 그림이 창고에서 버림받아 나뒹구는 것을 보고 많이 속상해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한 지인은 아버지가 붓글씨를 써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 선물을 받은 분이 제대로 보관을 못하고 버린 것을 마을 구석의 허름한 술집에서 주워서 대충 입구에 걸어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어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는지 알고 많이 속이 상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분은 그 집 주인에게 그 붓글씨가 아버지의 작품이며 되돌려받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간곡하게 드리고 집으로 가져오셨다고 한다.

그림이든 붓글씨든 자신의 손을 거친 물건들은 자식들과 비슷하다.

내 손을 벗어난 것에 대해 미련을 버리고 어찌 되든 상관을 말아야 하는데 타인의 손에서 버림받아 찢기고 구박받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식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버리더라도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직접 버려야 속이 시원한 것같다. 내 자식이 팔삭둥이 모지리이든, 장애인이든 많이 부족하든 내가 미워서 구박하는 것은 참아도 남의 손에서 천대받고 버림받고 찢어지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물건들이야 돈을 주면 사고 팔기가 쉽고 그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는 것이지만, 작품은 그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 있기에 남이 보면 무가치한 것이라도 직접 만든 주인에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어떤 미술가는 절대 자신의 작품을 공짜로 남에게주지 말라고 한다. 공짜로 주게 되면, 그 작품을 받은 사람이 그 작품에 대한 가치를 없는 것으로 여기지만, 댓가를 지불한 것은 함부로 취급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공짜로 얻은 것은 무가치 하기에 마음만 변하면 버리는 것에 미련이 없지만, 댓가를 지불한 것은 그 지불한 댓가만큼의 가치을 부여해서 함부로 버리길 주저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림이나 붓글씨등 작품을 그저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 전문적인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면 더더욱 그렇다. 그림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저 선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사람들 눈에는 그저 솜씨가 있으니 손짓 몇번이면 작품이 그저 생기는 줄 안다.

그러나 쉬워보여도 그저 생기는 작품은 없다.

그리고 절대 자신의 자식이 아무리 부족해도 그저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위와 같은 이유기 때문이다.

'모드'라는 실화를 소재로 한 캐나다 영화가 있다. 영화에 나오는 조금 몸이 불편하고 못생기고 부족한 여주인공은 작은 엽서만한 그림을 그리길 즐겼다. 그 영화속의 여주인공은 그림공부를 한 적도 없고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는 화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가난한 시골마을 남편의 사랑도 못 받고 온갖 구박을 받으며 유일하게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가진 여자다. 그녀는 원색의 물감으로 캐나다의 풍경을 작은 종이에 그리길 즐기는데, 어느날 그 여주인공이 그린 그림을 보고 어느 여인이 그 그림을 갖고싶어한다. 그리곤 그 그림을 팔 것을 제의하고 거래를 하게 된다. 그 이후 그 여주인공은 꾸준히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 여자는 계속 그 그림을 사들인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여주인공의 그림이 꽤 유명해지게 된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작은 것에 불과하고 유명하지도 않고 인정받지 못한 작가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 작은 그림을 그저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선진의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타인의 시간과 정성을 들인 것을 가져올 때는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다 못해, 농부가 정성을 들이고 땅이 키운 작은 상추 몇 이파리를 갖고싶어도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하물며 창작의 고통을 거친 작품이 이름이 없고 아마추어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여겨진다.

상추하나를 사더라도 돈을 지불하듯이 타인의 작품을 가지고 싶을 땐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에 주저를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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