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나의 청소년 시절

by 도이
20200916_145913.jpg

나는 가난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막노동을 하시는 아버지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시고 남의 집 과수원이나 밭일 혹은 독한 냄새가 나는 버섯공장에 일당을 받고 다니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난한 부모님은 나의 두 언니들 중 첫째 언니를 초등학교를 둘째 언니는 중학교까지 보내주셨다.

언니들 둘은 14살 17살에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어야 했고, 취직한 두 언니들은 생활비를 집으로 보내주었다.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딸들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이기도 했다. 여자에게 공부는 글자를 아는 정도만 하면 되었고 시집만 잘 가면 되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이십 대 중반쯤 제대로 된 직장을 가졌을 때 야간대학교를 부모 도움 없이 가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아버지는

"여자는 시집만 가면 되지 공부는 해서 뭐해."라며 반대를 하셨다.

팔십 대 중반이 된 현재도 아버지는 그러한 생각에 변함이 없으시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조선시대 사람들 같은 사고를 한다고 의아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의 부모님들은 아직도 그러시다.

그런 사고를 가지신 아버지여서 아버지에게 딸들의 교육과 딸들이 느끼는 결핍에 대해 걱정하시는 것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양반으로서의 도리였다.

그 도리라는 것의 기준이 현대적인 것이 아니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나 맞는 그런 것이다.

부모님은 사람을 양반, 상놈으로 사람을 구분하시고 양반 기준에 어긋난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보시게 되면 얺잖아하신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어른들을 뵈면 큰 절을 하는 것이 좋고, 어른들이 방안에 계실 때는 드러누으면 안되고, 무릎 위에 올라오는 짧은 옷은 입는 것이 아니고, 어른과 함께 겸상을 하는 것은 손자만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아버지는 독상을 받으셔야 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는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라서 귀걸이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에게 들은 얘기도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는 남존여비 사상이 투철하시다.

늘 하시는 말씀이 여자가 남자를 타 넘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옷가지도 타 넘어서는 안 되며, 빨래를 하면 남자 빨래와 여자 빨래를 구분해서 여자 빨래는 밑에 깔고 남자 빨래를 위에 놓아야 하며, 빨래를 널 때 햇볕이 잘 드는 중심에는 남자 옷을 구석진 곳에 여자의 속옷이나 기타 옷들을 널어야 한다는 등의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당연히 부엌 출입은 남자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무거운 밥상이라도 여자가 들어야 하며, 남자들이 물을 떠달라고 하면 당연히 여자가 물을 떠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고 도리라고 여기셨다.

그렇다 보니 나는 큰오빠가 자기 방 청소를 나에게 시키기도 했고, 오빠의 바지를 다려주기도 했으며, 오빠가 붓글씨를 쓰면 나는 옆에 꿇어앉아서 먹을 가는 봉사활동을 했다. 그것이 나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아버지가 걱정스러워하시고 노여워하시는 것들은 양반으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 도리에 위아래 위계질서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 것이었다.

내가 어쩌다 결혼한 언니에게 반말을 하게 되면 갑작스레 버럭 화를 내시며 훈계를 하신다. 그것이 아버지에겐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현실적인 경제, 교육,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했다.

어린 시절부터 늘 언니에게 친근한 반말을 하며 부르던 '언니'라는 호칭을 어느 날 갑자기 '형님'이라 부르며 반존대를 하지 않는다고 노여워하시며 호통을 치시니 적잖이 당황을 했었다. 요즘 세상에 존대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반존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신다. ' ~ 하시게, ~ 드시게, ~ 오시는가?' 등등 이런 어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존재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부모님은 그러하시다.

그리고 결혼한 오빠에게는 존대를 하여야 한다고, 혹여 어릴 때 사용하던 반말을 사용하면 돌 쌍놈이 쓰는 말을 한다며 아버지는 가정교육을 안 시킨 엄마를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나무라시기도 하시곤 하셨다.

아마도 나의 부모님이 청학동 훈장님 옆집에 사시면 아주 행복해하실 것 같다.


겨우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한 언니들이 졸업 후 간 곳은 밤낮없이 삼교대로 근무하는 방직공장이었다.

후일 나는 큰언니로부터 야간에 근무하다가 실수를 해서 주임한테 뺨을 맞은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슬픔을 느꼈다. 언니 둘은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부모님이 그리 하라 하시니 그리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투정한 번 부리지 않고 방직공장을 결혼하기 직전까지 다녔다.

이십 대 초반에 공장을 나온 큰언니의 학력이라곤 초등 졸업장이 전부였고 방직공장의 근무경력이 전부였기에 멋진 남편을 만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언니는 부족한 학력을 극복해보고자 검정고시공부를 하러 학원을 다녔었다. 그때 엄마는 큰언니가 공부를 하는 것보다 시집을 가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셨는지 큰언니를 선자리에 수시로 내보내셨고, 집에 있는 언니를 많이도 닦달을 하셨다. 그래서 큰언니는 집에서의 생활이 편치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큰언니에게는 결혼이라는 것이 어쩌면 도피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에서 탈출하다시피 결혼한 언니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던 것 같다. 형부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을 오래 하시고 돌아가셨을 때, 언니는 혼자된 삶이 더 행복하다 했다.

형부가 돌아가시고 싱글이 된 언니는 홀로 되고 나서 자립할 수 있는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

언니가 어느 날 울음을 토해내며 "하다못해 우유배달을 해보려고 해도 고졸 이상이라야 돼서 우유배달도 하지 못해요" 하며 아버지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프다.

냉정하게 보면 딸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가난과 그릇된 가치관으로 인해 그렇게 망쳐진 듯 보였다.


나의 청소년 시절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자란 나는 대학이라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었었다. 언니 둘이 고작해야 초등,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내가 어찌 대학을 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직장을 가졌으나 제대로 된 직장은 가지지 못했었다. 당연히 직장에서의 나의 위치와 주변의 시선들은 참 저렴한 것이었다. 그래도 언니들처럼 초등, 중학이 아니고 어찌 되었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삼 교대 방직공장을 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할 노릇이었다.

사회에서 내가 느낀 것은 학력이 낮은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런 현실을 피부로 느끼면서 나의 사회에서의 위치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고,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시험을 쳐서 인정받는 직장을 갖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중학교를 졸업하였을 때 두 언니들처럼 공장에 취직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께 대학교를 가겠다고 하겠는가?

학벌과 직업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나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말 공부가 목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학교를 가기에는 나를 금전적으로 지원해줄 사람이 없으니 최소한 시험을 쳐서 인정받는 직장인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겨우 교통비 정도와 밥값 정도 주는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고 첫 번째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홀로 외로이 공부하러 다녔던 기간이 참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변변찮은 직업을 그만두고 공무원 공부를 하러 대학도서관에 다닐 당시 나의 동기들은 그 대학교 4학년이었고, 이쁜 옷들을 입고 대학 졸업사진을 찍던 모습을 기억난다. 그런 아이들 틈에 허름한 바지와 잠바를 입고 백팩에 공부할 책과 점심 도시락을 싸서 홀로 대학 도서관에 몰래 숨어서 공부를 했다. 혹여 대학생이 아니라고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가끔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대학교에는 우리 집에 자취를 하는 내게 친구가 되어준 동갑내기 '해주'도 다니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매일 가방 하나 등에 매고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서는 내가 한심해 보였던지 엄마는 언짢은 내색을 하셨다. "뭐하러 그리 허송세월을 하나?"

어쩌다 방문한 결혼한 큰언니도 그랬다 "가시나 되지도 않는 공부를 한다고 그카노?" 가족들이 그리 생각하니 친구들은 오죽했으랴. 그러나 친구들은 거의 만나지 않았으니 어찌 생각했는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나는 오로지 홀로 매일 아침 산길을 올라 대학 도서관 구석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랬던 몇 개월의 시간이 내겐 참 소중하다.

많이도 외로웠고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았지만 내겐 그 시간이 정말 가치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다가 도서관 창밖 언덕에 바람이라도 불면 보드라운 초록 풀들이 파도를 치며 땅에 드러눕고, 하얀색 종이컵 바닥에 녹차가 진한 초록색으로 우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잔잔한 기쁨이고 외로운 나에 대한 위로였다.

생각해보니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도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홀로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낼 때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집을 떠나 나는 처음으로 홀로 사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독립을 한 것이다.

자취를 하는 방엔 싱크대 하나에 비품은 보잘것이 없었다. 작은 라디오를 하나 구입했고, 천으로 된 옷장 하나, 이불은 쓰던 것을 가져와서 허름한 관사에서 혼자 사는 삶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좋았다.

많이 좋았다.

독립한다는 것이 정말 많이 좋았다.

낡은 유리창으로 내방을 내려다보는 부드럽고 온화한 달빛이 너무 좋았고, 시멘트 담벼락 너머 바깥세상 구경하고 있는 주황색 능소화가 너무 좋았고, 밤새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도 좋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엄마의 힘들어 죽고 싶다는 신세한탄을 듣지 않아서 좋았다.

나의 청춘에 조금의 후회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집안 상황이 그러했어도 나의 인생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좀 더 일찍 깨우쳐서 개척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은

자녀들의 가정교육도 중요하지만 사회교육이 충분히 되어야 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셨어야 했다.


인생은 돌아보면 후회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무조건 잘 산 것이라고 위안 삼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손을 통해 태어난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