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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달과 풀 Oct 16. 2024

둘이 괴로울까? 홀로 외로울까?

몇 년 전 홀로 된 친구가 좋은 사람이 생겼다는 얘기를 었다.

새로운 연인에 대해 얘기하는 친구의 얼굴은 발그레해지고 눈은 반달이 되고 입은 치아가 보일정도로 환하게 다.

생각만 해도 그리 좋은가 보다.

평생을 자신을 돌봐주지 않던 전 남편과 살다가 오십이 넘어 중년이 된 나이에 어렵게 혼자가 되었고, 그런 친구가 외로이 늙을 것이 안타까워 새로운 사람을 만나볼 것을 권했을 때 그 친구는 나이 든 이성이 불편하다며 홀로 살 것이라 말을 했었다.

그러던 친구가 내가 본 가장 밝은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눈이 반달이 되어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그 사람얘기를 했다.

친구의 행복한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나 저녁산책을 함께 하며 나눈 대화는 서로가 신이 났었다.

그 사람은 다정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믿을만하며 중요한 것은 그 친구가 그런 감정을 오십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느껴보았다고 했다.

그 친구의 행복바이러스가 내게도 옮겨올 것만 같아 같이 신이 나고 좋았다.

결혼 이후 줄곳 경제적인 짐 집안살림을 거의 혼자 짊어지다시피 살아온 그 친구가 이혼을 하면서 가져온 돈이 거의 없어 제대로 된 집을 구할 돈도 없었는 모양이었다.

깔끔하고 살림 잘 살고 늘 잘 웃는 그 친구의 어두운 면을 친구의 밝은 모습 때문에 예상하지 못해 친구의 어려움을 들었을 때 놀라웠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친구야 말로 정말 우아한 백조로 살아온 것이었다.

목이 말라 애타는 나무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이 친구는 새로 생긴 남자친구의 다정함을 하나도 남김없이 쭉쭉 흡수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비실거리고 바스락거리던 나뭇잎이 생기가 돌듯 이 친구의 생기 없던 얼굴에 붉은 기가 돌면서 그리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다음 만남에 그 친구가 내게 그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했다.

넷이서 카페에서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나와 그 친구 그 친구의 남자친구 그리고 또 다른 친한 동생!

기대를 하고 저녁 여덟시가 넘은 시간에 카페에 들어온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어떻게 첫인상을 말도 안 해보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런데 처음 만나는 여자친구의 절친인 두 사람을 만나는 첫 만남에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밖에 나가서 한참을 받으며 기다리게 하고, 내가 물은 질문에 내 눈을 보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대답하는 등의 모습을 보며 이 사람에 대해 왜 친구가 그리 호감을 가졌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페에 나오며 친구에게 남자 친구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말하며, 나와 친한 동생은 함께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서로에 대해 조심스레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그 동생과 나의 의견이 그 남자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친구가 아파트에 돌아온 후 우리 둘은 방금 연애를 시작한 그 친구에게 우리의 느낌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다 얘기를 했었다.

"친구야! 사과를 하나 사도 시장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비교해 보고 골라, 어떻게 한 사람을 만나고 그냥 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니?  너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주는 게 어때?  괴로운 것보다 차라리 외로운 게 더 나을 수 있어."

그리고 며칠 후에 그 친구는 우리의 의견에

"너네들이 한 번 본 사람을 어떻게 제대로 알겠노?" 였다.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친구의 인생이고 우리는 제삼자이고 개입할 권리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힘들게 살아온 친구가 혹여 그 남자의 다정함에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못 듣고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을 못 생각하여 또 다른 불행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되었고, 대화를 나눈 우리는 우리의 판단이 맞을 것 같은 두려움에 그 친구가 천천히 알아가면서 연애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우리의 역할은 그것이 끝인 것 같았다.

평생 한 사람만 보고 살아온 삶이 그리 고된 것이었고, 이혼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서 이제 홀가분해졌는데 또 다른 고난이 온다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스스로 그 고난의 길이 달콤하다 여겨 그 길로 들어서는 것만 같아 걱정이 되어 조언을 했으나 그 조언은 그 친구에게는 듣기 싫은 말이 되었을 뿐이었는 것 같다.

그렇게 뒤늦게 만나 뺨이 발그레해지게 웃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친구의 부정적 의견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다만 나와 친한 동생의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틀려 내 친구를 그렇게 오랜 시간 붉은 뺨으로 웃게 만드는 사람이길 바래본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볼 때 내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이라 여겼으나 사실 달랐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신도 실수를 한다.

하물며 어찌 나의 판단이 옳은 것이라 고집부리겠는가?

어찌 그 친구가 새 남자 친구의 다정함에 눈 멀고, 귀 멀고, 바보가 될까?


삶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삶에도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

귀한 사람 얻는데 어찌 웃는 시간만 있을까?

사람을 얻으면 그 사람과 함께 짊어질 짐도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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