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가족이 싸우는 이유
부글부글 기포가 오르기 시작했다.
멘토스 하나가 들어간 콜라처럼
펑!
폭발이 일어났다.
결국 물건을 던지고 말았다. 4년 전에 사서 아직도 잘 쓰고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였다. 다행히 가오가 몸을 아직 완전히 지배하진 못해서 마지막에 침대로 방향을 틀었다. 침대 스프링에 튕겨 나온 스피커의 각진 모서리에 괜히 정강이가 맞는다. 악! 동그란 물건을 던질걸.
분이 풀리지 않았든지 아니면 비바람 번개 치는 내 방과 달리 TV 웃음소리가 왕왕들리는 거실 소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사실은 지금 당장 누구든 내게 와주질 않아서가 맞겠다.
그래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지르던 걸 멈췄다. 가만히 있는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주먹이 얼얼했다.
그러자 마침내 무지막지하게 폭우가 내리치는 이 방으로 아빠가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고 림보야”
내가 듣고 싶었던 그 말이다.
무슨 일….나는 어디서부터 이런 비구름을 몰고 왔을까.
어김없이 밥을 먹고 10분을 절대 넘어가면 안되는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집 문을 닫자마자 상쾌한 바깥 내음은 사라지고 텁텁하고 숨 막히는 공기가 온몸을 조여왔다. 짜증이 치민다. 머리를 울려대는 티비소리가 가득 찬 거실을 지나 방에 도착한 순간, 침대가 보인다.
다시 하릴없이 누워야 하는 관짝같은 침대. 잘만 누워있던 침대가 새삼 끔찍스러웠다. 덕지덕지 수건으로 만든 허리 받침대며, 잠만 자려하면 갑자기 오르는 열에 또는 갑자기 추워지는 몸 때문에 침대와 벽 사이에 껴놓은 여름 홑이불, 긴팔 긴바지 잠옷들.
그리고 그 말이 생각났다.
방 안에 가만 누워있다 보면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귀가 쫑긋한다. 그러면 나의 뒷담화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의도치 않게 나를 향한 부모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과 싸웠을 때, 고3일 때 아니면 수능을 망쳤을 때, ‘쟈는 아가 왜 이렇게 힘 매가리가 없나?’ ‘시험 어땠다는데, 못 쳤다나’
방문을 건너온 소리가 유난히도 생생하게 들렸다. 가슴이 두근하고 열이 확 오른다. 나가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무시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탄산이 혼자 끓는다. 부글.
이번에도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가 둥둥 떠다니며 버튼이 눌려버렸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다시 재생된다.
“재은이 집에 있나
요새도 누워있나
젊은 애가 진짜 우얄라고 그러노”
아빠는 불만이셨다.
그 한의원 가서 안나으면 빨리 다른 곳 알아봐야지
한의원에서 안 나으면 양방 병원 가봐라
능동적 치료를 해야지
그래 누워있는다고 낫나
결국 아빠 친구 한의원을 가자며 갑작스럽게 나섰다. ‘왜, 가기 싫나?’ 하는 물음에 “가요…” 라고, 들릴 듯 말듯 답은 했지만, 누가 봐도 가기 싫다는 티를 푹푹 내며 차를 탔다.
그런데 헉
생각해 보니 무려 30분을,
아빠랑,
단둘이서,
그것도 옆자리에서,
가야 한다.
나한테 말 걸지 마라, 마라, 염불을 외웠지만 역시나 아빠가 꼬치꼬치 물어오기 시작한다. 아휴 다 귀찮고 그만 말하고 싶다. 딱콩 갈기고 싶은 중2 말투가 내 입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아 운동으로 걷기하자나요’
‘아 병원 그래서 지금 바꿨자나요’
‘예전에 다 가봤는데, 안 좋으니까 그런 거죠’
결국 핵심을 찌르고 만다.
“근데 니 뭐 아빠랑 말하기 싫나?”
“아니요…”
“근데 왜 그렇게 짜증내듯이 말을 하노?”
“아..아.. 그냥…
허리 얘기가 지금 하기 싫은 거예요”
-삐삐삐삐삐
거짓말 탐지기가 100만 볼트 전기를 쏟아내며 우렁차게 울려댄다.
아니, 아니,
아빠가, 자꾸, 그만, 그만, 누워있으라고, 그랬잖아요
저도 눕기 싫어요, 저도 눕기 싫다고요
근데 안 누워있으면, 아픈데, 아픈데
어떡해요
울음에 북받쳐서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고장 난 AI처럼 몇 번 반복해야 끝맺을 수 있었다.
다시 비구름이 가득했던 내 방이다.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와 준 덕에 바람이 통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나는 올바른 감정을 토해낼 수 있었다.
아프면 감정 조절 능력도 떨어진다. 결국 내 몸이 아픈 건 통증 조절 능력이 고장 난 거였으니까. 만성 통증은 감정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몸이 아팠고 정신도 허약했다.
하지만, 이 병 덕분에 난 폭발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아놓기만 했던 아빠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런 내 감정을 전혀 모르고 있던 아빠의 속마음도 알게 됐다.
“우리 사이에 쌓인 게 있었나?”
우린 쌍방 혐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방 혐오였다니.
“쌓았다가 이렇게 폭발하지 말고, 말을 해라 아빠한테.
내가 그렇다고 이때까지 있던 일을 지금 다 사과한다고 니 모든 감정이 다 사라지겠나.
결국 니 스스로 감정을 털어내고 정리해야지.”
밉지만 맞는 말이었다. 내가 왜 혼자서 쌓아놓고 나를 곪아 먹게 했나. 상대는 이때껏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잘 살 동안. 물처럼 투명하고 깨끗해 보이는 사이다가 아니라, 부글부글 끓어올라 거품을 마구 흘려보내는 사이다로 살아야 했다. 그게 내가 병을 앓으면서 느낀 101번째 교훈이었다.